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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앉기


친구와 OO여대 축제에 갔다.

친구의 선배와 안면이 있는 누님이 자신의 과에서 운영하는 일일호프에 오면 부킹을 시켜준다고 했다.


축제는 다소 썰렁했고, 일일호프에는 같은 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였다. 남자는 우리 뿐이였다.
누님이 아무나 찍으라고 했다. 숱한 시선에 긴장 했다.

 

유독 우리 테이블에 서빙을 열심히 해주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호감가는 인상이였다. 철 없는 남자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할 만큼의 시선을 계속 보내왔다.

더구나 당시 난 중증의 왕자였다.

 

난 선택을 망설였다. 제안이 아닌 간택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새 인물이 활짝 웃으며 등장했다.
 
순간 피가 꺼꾸로 솟는 기분이였다. 슈퍼모델인 줄 알았다.

4학년 쯤되는 것 같았는데, 누님한테 학년을 물어봤다.
일학년 이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의 첫 지명(?)에 누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저 애 부킹해 주냐고 물었다.
난 화들짝 놀랐다. 말을 더듬었다.

 

"되, 될까?" 

난 이미 압도당했었다.
대답도 없이 누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곧장 그녀에게 갔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태초에 우주가 있었고, 역사는 면면히 흘러왔으며 또 지나칠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우리 테이블 근처를 지나쳤다. 고개가 푹 내려갔다.

 

누님이 와서 결과를 통보했다.

 

"그애는 이런 곳에서 만나는 건 싫대."

차라리 속 편했다.

 

"대신, 5분 있다가 정문 앞에서 보제.'

 

헛!!! 친구가 표정관리 할 것을 조언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최고의 미모에 남자보는 안목까지 뛰어난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표정관리에 완전히 실패했던 것 같다.
기꺼이 친구를 버리고, 득달 같이 달려가 정문 앞에 가 섰다.

 

미인 답게 제법 시간을 끈 후 누님과 같이 나타났다.
간단한 소개말이 오갔다.

 

그 때 아까 서빙해줬던 여학생이 어두운 표정으로 짐을 싸 들고 지나갔다.
누님과 슈퍼모델한테 차겁게 인사하고 가버렸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킹카'의 습성이다.

왕자는 착각과 오해, 진실과 이해에 연연하지 않는다.

 

잘 다물어지지도 않는 입을 억지로 악물고 근처 커피샾으로 갔다.

 

슈퍼모델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줬다.
냉담하고 품위있었다. 거기에 압도된 난 어떡하든 웃겨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분위기는 썰렁했고, 절망적이였다.
이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래도 연락처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제안조차 전혀 안한다면 슈퍼모델도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버스가 왔고, 슈퍼모델이 발걸음을 뗄때까지 최대한 기다린 후, 이제까지의 썰렁했던 모습을 버리고, 지나치듯 무심하게 물었다.

슈퍼모델은 얼껼에 적어줬다. 

 

일상으로 돌아가, 자존심과 냉정을 회복했다.

그 후 일주일간 두 차례의 통화를 통해, 여전히 냉담한 슈퍼모델에 내 자존심은 충분히 상처를 입었다.

 

얼껼.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사람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나, 유월이야, 이번주 우리학교에서 유명한 연극 공연제가 있는데, 화요일이 좋을까 수요일이 좋을까?"

말의 내용보다는 분위기다. 내 목소리는 자연스러웠고 당당했으며 확신이 있었다. 거절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당황해했다.

 "수업 시간표좀 보고..." 

   

전화를 끊고 환희에 내달렸다. 슈퍼모델과의 약속보다는 내가 생각하고 연출한 바가 성공했기 때문이리라.

 

슈퍼모델과 학교 근처를 거닐자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몇몇 지인들과 마주치며 또 표정관리에 실패한 것 같다.

 

슈퍼모델이 제안했다. '우리 연극 보지 말고, 그냥 커피샾 가자'
사실 난 연극이니 영화 같은 거 별로 안 좋아 한다.

 

돌이켜 보면, 첫 만남이후 내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부분은 단지 다음 만남의 자리를 갖기 위한 기술적 노력 뿐이였다.
본 게임이 아닌 참가승인만 신경쓴 셈이였다.

 

우리의 대화 분위기는 당연히 첫만남 때와 비슷했다. 고민과 준비가 없는데 변화가 있을 리 없다.
고상한 것을 원하는 상대에게 개그만 해댔다.

 

"어제, 왜 내 의사는 확인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았어? 뭐, 그건 됐어, 난 까부는 남자 싫어."

 

별 말을 다 듣게 됐다. 근데 어쩌라... 당혹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의 침묵이 필요했다.

기분이 차분해 졌다. 곧 일어서며 선선히 말했다. '그래 이만 일어나자'

 

'잠시만 더 있다 가'

슈퍼모델도 다소 처진 말투였다.
아무리 슈퍼모델이라도 역시 모진말을 했다는 것은 부담스러울것이다.

사실 사람이 독해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난 반응했다.      "어, 그래;;'

엉거주춤 앉았다. 

 

비록 철은 없었으나, 의미없는 분노가 내 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나 보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 계속되었다.

 

매너를 지키고 싶었다. 침묵은 매너가 아니다.

"사람이 주먹으로 얼굴을 한대 맞게 되면, 인상을 쓰는 건 당연한 거 같아.'

 

또 침묵... 그녀가 말했다.

'난 못된 애인거 같아, 엄마도 그런 말을 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그 정도 배려면 됐어.'

 

이내 자신이 못된 애라고 느껴지는 단상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외모와 달리 언변은 세련되지 못했으나 진솔했다.

자신의 심성에 대하여 상당한 심적 부담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해 온 것 같았다.

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의 고교시절 경험과 최근 심리학 강의를 통해 얻은 지식을 가지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어 최근 거의 이별직전이라는 남자친구 이야기까지 나왔고, 자신의 고교시절, 선생님을 짝사랑한 이유도 나왔다.

 

문득 시계를 보니 두 시간 이상  흘러 있었다.
 
왜 갑자기 대화 분위기가 급변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어색한 침묵을 겪었고, 마주앉지 않고 통유리벽을 향해 나란히 앉은 것이 대화의 집중도를 높인 것 같긴하다..
아무튼 난 경청의 위력을 실감했고, 나도 슈퍼모델의 다른 모습에 진지해 졌다.


나와서 상당 시간 걸었다.
오늘 나온 이유는 나에게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얘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보면 전혀 다른 면에 놀라게 된다고도 한 거 같다.

이미지가 바꿨다. 몇시간 전만해도 냉담하고 거리가 크게 느껴졌는데, 다소곳한 '여자'가 되어 있었고, 친밀감도 느껴졌다.


난 말이 많고 가벼운 남자다. 성격도 급하며,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침을 튀기며 내 이야기 하기를 좋아 한다.

대학 1학년 이후 그 반대의 모습이 되고자 노력했다. 전적으로 슈퍼모델 과의 만남때문만은 아니지만, 작은 계기는 되었다.
그러나 변화가 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비슷한 모습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한테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라는 말을 들었을때 참 이채로웠다.
이제는 가끔 내성적이란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