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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의 요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강원도 대명콘도에서 있었다.

 

경영학과 총 200 여명 중 여학우는 10명 정도였다.

이름순으로 4개의 반을 편성했고,  다시 행사 진행을 위해 반을 2개의 조로 나눴다.

우리 조에는 우연히도 여학우가 3명이나 속했다. 3명 모두 외모도 무난한 편이였다.
부러움을 받는 조가 되었다.

 

조별로 콩트를 만들기 위해 회의를 했다.
시나리오를 짜고자 갑론 을박이 계속 되었다.

시나리오 내용 상 커플이 필요했다. 조장이 말 많고 키큰 녀석에게 파트너를 지목하라고 한다.
내용을 다듬는 과정에서 한 커플이 더 필요해졌고. 재수생이 또 다른 한명을 지목했다.

홀로 지목받지 못한 여학우의 얼굴이 빨개 졌다. 목과 팔 등 드러난 것은 모두 빨개 진 거 같았다.
빨갛게 오른 얼굴때문에 흰색 안경테가 돋보였다.
 

처음 본 후 지금까지 말 한마디 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

난 분연히 일어나, 시나리오의 내용상 커플이 하나 더 필요하며 내가 저 여학우와 하겠다고 주장했다.

 

동정심이나 정의감 때문이 아니였다.

가치의 문제였다.

나의 고감각 안목으로는 셋 중엔 하얀 안경테가 가장 괜찮았다.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휴머니즘에 입각한 명분으로 오해한 조원들은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억지가 가미된 어색한 시나리오는 완성되었다.

 

나의 휴머니즘에 대한 조원들의 암묵적 지지와 감탄을 의식하게 되자, 난 안경테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안경테의 상처가 쉽게 치유되진 않았지만, 그녀도 나의 오버액션에 점점 얼굴이 밝아졌다.

안경테와의 첫 만남이였다.

*
새내기의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원래 내성적인 안경테는 교우들과 그다지 말이 없었다.

홀로 조용히 창너머에 시선을 두곤 했다.
그러나 나를 보면 수줍은 듯 인사를 해왔다.

 

한번 공주로 모시게 되자 중단이 곤란해 졌다.
다른 여학우들의 부러운 시선을 은근히 즐기며, 안경테를 찬양하는 나의 태도는 점점 일상이 되었다.

 

그녀를 향한 나의 코멘트는 대부분 그녀에 대한 찬미였고, 프라이어티가 제공되었다.
안경테는 처음엔 다소 불편해 하고 어색해 했지만, 차차 익숙해졌고 자연스럽게 받아 냈다..


학기초 나는 경인전철을 이용하는 친구들과 쉽게 어울렸다.
나와 안경테는 경인전철 무리들과  곧잘 저녁도 먹었고, 공강시간에는 서울구경을 다니기도 했다.
안경테는 집이 서울이라 지리에 익숙했다.

 

만난지 얼마 안되는 친구들은 호의를 베풀기 쉽고, 친절하기 마련이다.
나의 안경테를 향한 과잉액션에 잘도 호응해 주었다.
그렇게 몇달을 보낸 것 같다.

 

항상 소극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조심스럽던 안경테였다. 옷도 모범생 스타일로 수수했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강의실에서 나와 친구들의 옆자리로 찾아 앉을 때의 수줍음이 없어졌다.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즐겨 말하기 시작했고, 식사하러 갈 곳을 먼저 제안했으며, 남학우의 쇼핑물품을 적극적으로 골라줬다.

 

급기야 렌즈를 착용하며 안경을 벗어 던졌고, 등에 메던 가방을 버리고 패션잡지를 꼽은 핸드백을 들었다.
낯선 하이힐의 걸음 걸이는 거침이 없었고, 옷 차림은 화려해졌다.

뭇 남학우 앞에서 자신 있게 웃어 보이는 그 산뜻한 미소는 변화의 절정이였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목구비는 타고 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여진 인상은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이목구비가 멋져도 매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
이쁘지 않아도 매력적인 여자도 있다.

 

그 차이는 얼마나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느냐에 달린 것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를 대하는 듯 하다.

 

나와 친구들은 집단적으로, 안경테가 소중한 자아를 인식하도록 주지시킨 셈이였다.

 

꿈이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도 같은 맥락일지 모른다.
소중한 꿈은 소중한 자신이다. 매력있다.

 

타인에게 내미는 손길이 거부당하면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자신감을 잃은 손길은 외면 당하기 쉽다.
악순환을 벗어나기 힘들다.
당당하게 내미는 손길은 매력적이다. 누구에게나 환영 받을 수 있다.

 

이제 그녀를 찬양하는 이들은 경인전철 무리뿐이 아니였다.
자신있게 손을 내미는 그녀 주위로 남학우들이 기꺼이 호응했다.
짖궃은 녀석의 농담과 투정을 받아내는 넉넉하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며, 이 위대한 변화에 전율했다.

 

위기가 찾아왔다.
친구에게서 미팅 제안을 받았을 때, 옆에서 지켜보는 안경테를 의식했다.
스스로에게 충격이였다.
더욱 유감스러운 점은, 내가 의식한 것을 안경테도 느꼈다는 점이다.

그날 안경테는 단둘이라는 명확한 조건하에 캠퍼스가 이쁘다는 타대학으로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혼란스러운 난 적당히 거부했다.

 

품격있는 립서비스를 제공해 왔지만,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은 충분히 매력있지만, 난 그 매력의 의도하지 않은 창조자다. 그 매력을 향유하는 것은 어색하다.
또한 난 그 자신있는 미소 이전의 모습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아니다 솔직해지자.

충분히 이쁘지 않아서다.

거부하기로 했다. 그러나 소프트랜딩은 힘든 일이다.
 
이제 그녀 주위에는 나를 대신할 친구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거리두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일단 상황 파악을 했다.
절망적이였다.
내가 미팅을 의식했던 것 이상으로 안경테도 남학우들과의 일정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찬양에 도취된 나머지 방심했나 보다.

 

"아무개 괜찮지 않냐? 그 녀석이 너 무지 좋아하는 거 같더라.'
 

썰렁했다.

"나 내일 미팅간다. 이번엔 정말 건져야지.'
 

유치했다.

 

나의 코멘트 보다는 나의 태도에서 안경테는 내 마음을 알아 버린것 같다.
나도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이것이 매너라고 생각했다.

 

굵은 눈썹이 안경테와 부쩍 가까워졌다. 캠퍼스에서 단둘이 다니는 모습도 종종 목격됐다.
순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친구 많고 씩씩해진 일학년의 여대생에겐 다행히 큰 부담이 되어 보이진 않았다.
다만 약간 불편해 졌을 뿐이다.
기우였던 셈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안경테가 굵은 눈썹한데 4번이나 소개팅을 시켜줬다고 한다.

그 중엔 대단한 킹카도 있었더라는 날벼락같은 뉴스에 땅을 쳤다.

 

나의 협소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에 대한 참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에 안경테는 나에 대해 분명한 연모의 정이 있었으므로 난 해당사항이 없었으리라 자조해야 했다.

상상할 수도 없지만, 굵은 눈썹이 나정도 킹카였다면 소개팅을 주선해 줬을까...

 

자조는 늘 초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