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표현하기


복학을 앞두고 시간이 애매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집근처에 레스토랑 주방보조 자리가 있어, 전화하고 찾아 갔다.
삼십대 중반 쯤인 두 남매가 운영하는 곳이였는데, 마침 여동생만 있었다.

 

내 인물을 보더니, 주방보조대신 홀 서빙을 맡으라고 했다.
선참을 소개하며 일을 배우라고 했다.
나보다 세살 정도 어린 여자애였다. 짧은 파마머리가 나름 세련됐다.

 

설겆이 된 말린 수저의 얼룩 닦는 일에서 테이블 셋팅까지 이것 저것 일을 배웠다.

알바를 하면서, 내가 집에서 곱게 컸음을 실감했다.
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주변머리도 그다지 없었음을 알았다.

 

덜렁대는 성격이다 보니, 테이블에서 손을 놀리다 물컵을 툭 쳐서 엎기 일쑤였다.
네번째인가 엎었을 때, 처음 들은 말이 있다.

 

"여기요, 이거 안 닦아 주시는 거에요?"

그제야, 물을 엎으면, 닦아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이런 당연한 걸 콤플레인 하지 않았던 앞선 손님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기가 막혔다.

 

돈까스를 시키면, 작은 공기 2개에 각각 국과 밥이 담겨 제공된다.
한번은 돈까스 셋을 서빙하는 데 밥그릇이 떨어지며, 앉아 있는 여자손님의 머리를 딱! 쳤다.

  

순간, 그 손님은 주방에서 일하던 사장님이 뛰쳐 나올 정도의 고함을 질렀다.
그리곤 하는 말이
"죄송해요, 국 그릇인줄 알았어요..."

난 당당히 괜찮다고 대답했던 거 같다.

착한 손님만 모셨나 보다.
인상이 너무 좋아서 그랬을 거라는 부사장의 의견에 별 이견은 없다.

 

너그러운 손님들과 호의적인 사장님 남매, 아직 세상은 사회 경험 일천한 학생에게 친절했다.

 

한사람 빼고..

 

내 선참 파마머리는 내게 유독 차가웠다.

알바일을 알려 줄때부터 잔뜩 무게를 잡더니, 내내 퉁명스러웠다.

 

당시 난, 자연스럽지 못한 작위, 일명 오버는 결국 내숭의 일종이라는 것을 오랜 관찰을 통해 느껴오던 차였다.
증오의 대상과 애정의 대상에게 비슷하게 반응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긴 증오와 애정은 결국 지극한 관심이므로 통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쥬스 한잔씩 시키고 몇시간씩 수다떨다 가곤 했던 여학생들이,
'저희 너무 자주 오죠?" 하고는, 자신들끼리 한참을 웃고 갔던 날,

파마머리의 신경질은 극에 달했고, 난 그 모습이 웃겼다. 

웃는 내 모습에 파마머리는 한층 더 짜증을 부렸다.
 

순수하니 절제를 모르나 보다. 나도 슬쩍 짜증이 났다.

넉넉히 받아주는 것이 별로 현명한 처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끔 수줍어 할 줄도 알았다.

"얘, 날나리야, 주안역 락카페를 완전히 주름잡는다니까"
"왜 그래~, 진짠 줄 알잖아"
여동생인 부사장의 무심한 농담에 흥분하다가, 수줍어 한동안 피하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사장은 조용한 성격으로 자주 자리를 비웠다.
반면 부사장은 활달하고,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가게 운영을 떠맡다시피 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엔 레스토랑 한켠에서 주변 상인들과 모여 잡담을 즐겼다.

그 잡담에 나도 자주 꼈고, 파마머리는 툴툴대며, 뒷 정리를 하곤 했다.

부사장은 틈틈이 삶의 애환에 대한 장황한 일대기를 풀어놨고, 난 신경써 들어줘야 했다. 나름 재미도 있었다. 

   

그 날도 부사장이 자랑스레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 자랑스런 추억이 사실일 수 없다는 중요한 모순을 내가 무심결에 지적했던 것같다.
자아가 부정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거다.
부사장의 분노는 폭발했고, 알바의 평화는 끝났다.

 

갈굼을 받기 시작했다.

자주 오는 부사장의 친구가 만류할 정도로 티가 났다.

알바야 관두면 그만이겠지만, 나의 경솔함이 미안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월급날이 며칠 안남았다.
 
파마머리의 전담이였던 빈 소스통 채우기를  비롯한 잡일이 더해 졌고, 사사건건 트집을 일삼기 시작했다.
갈굼의 질이 유치해서 웃고 말려고 했으나, 귀찮고 피곤해지면 짜쯩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나보다.

 

내 한숨이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월급만 받으면 그만 둘 것을 파마머리도 눈치 챈 듯했다.

 

그때부터 파마머리는 말 없이 내게 할당된 잡일을 척척 해냈다.

 

"웬 일이야"
"뭐가여~, 그냥 시간이 남아서 하는 거에요"
"나 그만 두려고"
"... 그러던지 말던지"

 

그날 내내 파마머리는 말이 없었다.
딱 한번 부사장의 잔소리에 짜증냈을 뿐, 조용히 일만 했다.

  

월급날이다.

내 종업원 전용 앞치마 주머니에 포장된 뭔가가 있었다.
이승환 테이프였다.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올때마다 내가 흥얼거렸던 노래였다.
약간 감동했다.
어디갔는지 파마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부사장이 안 보이는 파마머리에게 삐삐를 쳤다.

  

이내 들어온 파마머리는 내 눈을 어색하게 피했다.

그 순수한 모습에 미소를 보냈다.

이제 갈껀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정이 아닌 동정심으로 손을 내민다면, 서로에게 비극일 것이다.

 

"고마워, 잘 들을께"
"뭐가요~, 그냥 두개 생겨서 준거에요" 퉁명스레 얘기했다.

더 말하기 싫어 졌다.

 

떠날때 뒤가 가려웠던 것은 내가 왕자인 탓일 것이다.

 

풋풋한 순수함도 좋다. 그러나 난 안끌리는 걸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