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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전성시대


동아리 방에 가서 낙서장을 펼쳣다.

  [요즘 그 사람 생각에 너무 힘이 듭니다.
   이런 내 마음을 그는 절대 알 수 없을 거에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가 문을 열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올것 같습니다.
   밝게 미소짓는 얼굴을 보는 내 마음은 너무 무겁습니다
   이런 제가 바보같지요?]


도대체 누가 누구를 향해 쓴 글일까

추론에 들어갔다.
우선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제외했다.
무미건조한 성격도 제외했다.

그래도 많았다.

 

접근 방법을 바꿨다.

 

환한 미소가 인상적인 남자는 누굴까

 

나외에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그날 저녁 동아리 사람들과 술을 먹었다.
내가 이상해졌나 보다.
모든 여자들의 나를 향한 시선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다시 머리속에서는 추론이 이어졌다.
내 자리 근처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제외했다.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관찰했다.

한명이 직관적으로 감지 되었다.
늘 조용한 성격으로 나하고는 별 이야기도 해본 적이 없는 1년 아래 후배였다.

즉시 드는 생각이 있었다.
도대체 이 추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글쓴이도 밝혀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꼭 그 후배가 마음에 안들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무튼 생각을 접었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그 후배를 보니, 과음을 한 듯 힘들어 보였다.
내 여자 동기가 열심히 챙기고 있었다.
그 둘은 같은 과였다.

 

그 동기는 내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듯한 인상을 줬다.
낙서장때문인지 내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신경껐다.

 

길을 나서며, 또 다시 명석한 두뇌가 돌아갔다.
그 동기는 나를 잘 안다.
내가 그 후배에게 관심이 없을 거란 것도 알것이다.
그럼 원망은 성립되는 것인가...

 

며칠 후 그 동기와 구내 매점에서 음료수를 마셨다.

'그 낙서장 글의 주인공 알고 있지?'

갑작스럽고 너무도 노골적인 질문에 대답을 지체했다.
시치미를 떼기엔 타이밍이 늦어져 버렸다.
'응'
'어때?'
'글 잘 쓰더라'
'어떠냐구'
'니가 짐작한 대로...'
'...잘 났어 정말... 그런 식의 고백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누구나 기분은 좋겠지'
'그리고?'

 

숨도 안쉬고 일장 연설을 했다.
남자는 당연히 자신의 거부가 여자에게 크리티컬 데미지가 될 거란 생각에 미안해 할것이다.
핵심은 미안해 할 뿐 특별히 해줄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쭐한 마음이 넉넉한 너그러움으로 승화되어 마음에도 없는 친절을 베푸는 것이 문제다.
결코 서로에게 도움 될 것이 없는 일이다.
행여 그런 식으로 우연찮게 사귀게 된다해도, 파국을 맞기 딱 좋다.
우쭐한 남자의 자기함정이다. 결코 오래 동안 우쭐해 있을 수가 없다.

다시말해 그런 미안한 마음에 의존하는 관계란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
미안한 마음은 스스로도 주목하지 않는 편이 낫다.

 

'마치 모든 남자를 안다는 투네'
'상당히 많은 남자가 그렇다는 거다, 물론 나같이 진정한 배려를 아는 남자도 있지'

 

동기는 진지했다.

그러나 똑똑한 애인데도,  자기합리화니 '이쁘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았겠지'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제 방금까지의 대화에 대한 내 최종 소감을 동기에게 간단히 피력해야 했다.

 

'나 좋아하지?'
그냥 웃어 버리는 그 표정이 이뻤다.

 

수업은 들어가기 싫었고, 유월의 햇살은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