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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 안목


제법 늦은 시간, 하교하는 전철 안이였다.
언제나처럼 문간에 기대어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젊은 처자가 옆 칸에서 건너와 내 앞에 섰다.
상당한 미모였다.
산뜻한 옷차림에, 야무지고 자신감 넘치는 밝은 인상이 보기 좋았다.

 

확 끌렸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자꾸 시선이 갔다.

막연히 말을 걸어본다는 상상을 했봤다.

긴장감이 느껴지며 기분이 상쾌했다.

 

시계를 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곧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느낀 긴장감이 깨질 것 같아 확 저질러 버렸다.

한가지 생각만 했다.

절대 자연스러워야 한다.

 

"어디까지 가요?"
"...?   동인천이요"

 
뻔뻔해야 한다
당당히 그 눈을 들여다 보았다.
싫지 않은 표정에  안도했다.

어색한 날씨 애기를 했는데, 대충 대화가 이어졌다.

 

참 명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리가 나서 나란히 앉았다.
딱히 할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오전에 신문에서 읽었던 경제관련 사설을 대충 내 의견인양 읊었다.
적절한 화제는 아니였지만, 그럭저럭 유식한 인상을 주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동인천 역에 도착했다.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 일단 연락처만 받고 헤어졌다.
'
며칠 후 통화를 했다.
친구랑 같이 나올테니, 내게도 친구와 동행하라고 했다.
동인천까지 동원이 용이한 고교동창을 불렀다.

이쁜 여자는 자기보다 이쁜 애는 안데려오더라는 선배의 말이 생각나 친구한데 미안해 질 것 같았다.

 

의외였다.
명랑 소녀 못지 않은 미모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명랑소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명랑소녀의 화려한 옷차림과 달리 수수한 남방에 청바지 차림이였지만, 보기 좋았다. 

 

난 명랑소녀 맞은 편에 앉았다.
나나 동창이나 남자고등하교를 나와서 그런지 이성 앞에서 쉽게 경직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많이 개선이 됐는데, 이 녀석은 여전했다.
무게를 잡는 폼이 영 어색했다.
.
오늘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명랑소녀는 약간 푼수 끼가 있었다.
이쁘면 다 이해된다.
동창녀석이 계속 무게를 잡고 있어서 내가 분위기를 열심히 띄워야 했다.

 

친구녀석이 팔로 내 어깨를 찍어누르듯이 감싸며 말한다.
"내가 이자식보다는 훨씬 술을 잘 먹지'

 

평소 날 무시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닌데, 두 미인 앞에서 간이 부었나 보다.
기분은 나뻤지만 충분히 이해는 됐다.

나중에 따로 불러 녀석에게 충고를 해줘야 겠다.
그런 스타일은 어린 고딩한테나 통하지 그다지 경쟁력이 없는 것이 요즘 경향이라고.
내가 이리 처절하게 변신한 것이 그 예라고...

 

또 의외였다.
놀랍게도 친구의 터프 컨셉이 명랑소녀에게 어필 되는 듯 했다
명랑소녀는 나보다는 동창에게 관심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기분이 꿀꿀해졌다. 잠깐이였지만 동창한테도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난 남방소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상황이 좀 웃겼지만, 일단 녀석을 화장실로 끌고 왔다.

 

'너 명랑소녀 맡아, 내가 걔 친구 맡을테니'
 

녀석이 조금 아쉬워 하면서 응낙했다.
욕심많은 녀석...

 

화장실에서 돌아오며 자리를 바꿔 앉았다.

명랑소녀는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채 말했다.

 
"왜 바꿔 앉아?"

 
명랑소녀는 자리 교체가 내 동창의 의중인지를 확인코자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동창이 나를 쳐다본다.
여지껏 목소리 깔고 어깨에 힘주던 녀석이 이럴땐 쑥쓰러워 한다.
정작 힘쓸때 빼는 거 보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남방소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렇게 앉고 싶었어'

 

나름 느끼함을 무릅쓰고 날린 멘트건만 그닥 반응이 없었다.

 

동창과 이야기를 하며, 명랑소녀의 얼굴엔 점점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에 속이 쓰렸다.
별거 아닌 녀석한데 밀리니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동창은 명랑소녀의 관심에 고무되어 점점 말이 많아 졌다.

녀석의 과장된 몸짓과 유치한 얘기에도 명령소녀는 어린애 마냥 좋아했다.

 

화기애애한  그 두사람과 대비되는 우리 쪽 분위기에 상대적 빈곤감을 느꼈다.
상황 타개를 위해 고민했다.

결국 이럴때 무리한 돌파구를 찾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어차피 장기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오늘은 찌그러지기로 했다.

 

혼자 과음을 했다.
내 모습이 처량맞아 보이는지 조용하던 남방소녀가 문득 질문했다.

"원래 소극적인 성격이세요?"
명랑소녀와 달리 아직도 존대말이다.
"아니, 오늘은 그 미모에 압도돼서 그런가봐.'
과음을 했는지 강약 조절이 안됐다. 썰렁했다.

 

"오늘 너 왜 이리 자꾸 느끼하냐?"
배부른 동창녀석이 오히려 견제를 한다.
그렇잖아도 기분 처지는데 염장을 긁는다.
지금 잔득 기분이 오른 녀석을 건들어 봐야 절대 지려고 하지 않을테고, 나만 열받는다.
유치한 녀석은 용서하고 역시 오늘은 찌그러져야 겠다.

장기적으로 보자!!
오늘은 연락처만 트자!
한 잔 또 들이켰다.

  

눈 뜨니 집이였다.
필름이 끊겼었나 보다.

 
원래 결코 술이 약하지 않은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예측과 계획이 어긋나기만 했던 어제였다.

순간 남방소녀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정신 차려요, 또 안볼꺼에요?]

 

서둘러 동창에게 호출을 때렸다.

남방소녀의 연락처를 챙겨야 했다.
녀석은 연락도 없다.

 

며칠 후 녀석과 통화했다.
남방소녀 연락처를 받아내라고 요구했는데, 말하는 투가 영 어색했다.

쑥스러운지 자세히 얘기도 안하려 했다.

 

분노의 추궁 끝에, 들은 얘기를 정리해보면, 그 다음날 또 만났었나 보다.
그리곤 잘 따르던 명랑소녀에게 말실수를 했는지 싸우고 끝난 거 같다.
그날 지극히 떠받을어 준 명랑소녀의 태도와 '어쩐지 오바한다' 싶은 녀석의 들뜬 모습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이런 XX같은 자식아, 걔 친구 연락처는 받고 끝냈어야지!"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명랑소녀는 내 호출에도 영 무소식이였다.

 

'장기적 안목'에 한숨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