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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동아리 동기 중에 학교를 대표해도 무방할 정도의 미인이 있었다.
외모뿐아니라, 말투나 행동, 옷차림도 매력적이였다.
활동적이였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 했다.

당연히 남자가 많이 꼬였다.
나중엔 죽겠다고 나선 남자도 여럿 있었던 거 같다.
물론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다. 

난 그 시절에 이미 블루오션 개념을 파악했었나 보다.
어쩌면 요원한 목표라서 쳐다도 안본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대표미인과 두학기째 동아리을 생활하면서,

(물론 함께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것은 좋았으나)
그 이상의 마음을 갖지 못했다.

 

가을에 새 얼굴이 동아리에 나타났다.
직장을 다니다 야간 학과에 들어온 여학생으로 나보다 두살인가 많았다.
처음 동아리 방을 찾았을 때부터 그 수줍은 듯 선한 미소에 호감을 느꼈다.
쑥스러워서 제대로 말도 못 붙였던 기억이 난다.

이런 나의 모습에 친구들이 재밌어 했고, 그래서 그녀 앞에서의 내 행동은 더 어색해지기만 했다.

 

가을 엠티를 갔다.
나의 모든 관심은 온통 선한 미소에 집중되었다.
관심이 집중될수록, 그래서 친구들이 놀릴 수록 더욱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근처에서 어울리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찔끔찔끔 바라봤을 뿐이였다.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꿀꿀한 기분으로 넓다란 방의 구석에 가서 자고 있는 친구옆에 누웠다.

 

문득 잠이 들었었나 보다.
흐느끼는 고음의 미성에 잠이 깼다.
대표미인이였다.

 

'...난 언제나 혼자였어.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 주지 않아...
...3년쯤 전부터 계속 이렇게 느껴 왔어,
언제나 난 외로웠어...'

 

황당한 이야기에 귀를 의심했다.

그녀와 거의 붙어 지내던 친구가 더불어 흐느꼈다.
'너한테 실망했어! 난 뭐니?"

 

내 근처에 있던 대표미인의 같은 과 선배가 옆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하는 얘기가 들렸다.
'쟤가 저번에 우리 과모임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구"

 

그 말을 듣자 대표미인은 저런식으로 인기관리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수룩한 선배형이 위로를 시도했다.
'왜 혼자라고 생각해?"

 

소 닭 보듯 생각했다.
[그렇게 물어보면 안돼지, 대답도 궁할텐데
지금 대표미인이 원하는 것은 단지 감성 공감이데...
하긴, 저 하늘 높은 자의식을 어찌 맞춰 주랴...]

 

대표미인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여기있는 경환이 오빠, 은주언니, 미숙이, 선한미소,...
엇 선한미소도 있다
난 나서야 함을 느꼈다.

당연히 대표미인이 듣고 싶은 멘트를 날려야 했다.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선한미소를 의식하며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XX아, 너가 그렇게 느꼈던 것은, 3년 전에도... 어제도... 넌 항상 혼자였기 때문이야'

 

어수룩한 선배의 어이없어 하는 반응이 들렸다.
'쳇'
고감각 멘트의 분위기가 깨지자, 그 이상의 말을 중단했다.
 
하지만 내 말이 그녀의 격조에 맞았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표미인의 빛나는 눈길을 받으며, 난 공허한 표정을 지어 보여야 했다.
하지만 나의 머리는 선한 미소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표미인이 일어 섰다..
사람들도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기가 그녀를 위로하려 다가갔다.

 

대표미인이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와의 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난 선한미소한테 가야 한다.
대표미소의 요구에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선한미소를 의식하는 나를 보며, 대표미인의 눈에서 순간 표독스러운 광기가 흘렀음을 분명히 보았다.
그녀가 분노를 머금고 기다리는 동기에게로 돌아섰다.

선한미소는 숙연한 공기에 피로를 느끼는 듯, 여자들 방으로 사라졌다.
헛다리 짚었다.

 

상당 시간, 대표미인은 수심가득한 선배와 동기들의 위로와 관심을 온전히 감당하느라 고생했다.
흐느낌을 쉬이 멈추지 못하는 그 수고로움에서 공인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며칠 후 저녁,
동아리방에서 굴러다니는 소설책이 손에 잡혔다.
무지 재밌었다. 열심히 읽고 있었다.
대표미인이 평소보다 과도한 관심을 보였다.
'무슨 책이야?'
'굉장히 재밌나 보네, 나도 읽어봐야 겠다.'

 

저녁 9시가 되도록 대표미인은 동아리방에서 서성였다.
대표미인이 머물자 몇몇 남녀 추종자들도 같이 남아 있었다.
나 역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동아리방에서 남아 있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였다.

 

책읽기에 열중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얼핏 맥주나 먹으러 가자는 소리도 들렀다.

 

책을 덮었을 때, 기다림에 지루했던 그녀의 눈이 빛났다.

 

'늦었네, 먼저 갈께'
서둘러 돌아서는, 내 시야의 잔상에, 그녀의 황당해 하는 표정을 얼핏 느낀 것 같았다.

혼자 웃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일단 심술을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대표미인의 [짧은 관심]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난 대표미인의 장식품이 되긴 싫었던 모양이다.
나도 나름 자부심 있는 왕자다.

 

그런데 그것이 대표미인이 내게 준 마지막 기회였나 보다.

 

이후, 내게 상당히 냉담해 졌다.

그게 불편해서 말을 건넸다.

'그거 햇볕에 말리면 안 좋을텐데..'

'나도 알아! 사람 무시하지마'
깊은 분노를 느꼈다.
평소 상냥한 그녀의 과도한 반응에 주위 사람들도 놀랬다.


한동안 대표미인을 멀리 했다.

 

미안하다. 이해한다.

 

대표미인은 졸업과 동시에 그 명성에 걸맞는 대단한 남자와 결혼하여, 몇몇 남자들에게 눈물을 강요했다.

 

난 스캔들이 없었기에, 동아리 기념사진 촬영 때에도 그녀와 편하게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보람을 느낀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