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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의 향기 #2

아리조나...   

이 동네는 2층 건물도 찾기 힘들다.
방대한 땅을 널리 개발하기 위해 고층 건물 허가가 까다롭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슈퍼마켓을 가려고 해도 겁나게 멀다.

대중교통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자동차가 필수다.

 

그래서 자전거를 구입했다.

 

요즘 스미나에게 찝쩍거리는 녀석은 그 비싸다는 콜벳인지 뭔지를 몰고 다니는 일본인이다.
약간 뚱뚱하고 금 목걸이에 썬글라스를 꼭 쓰고 다니는 놈이다.

 

방과 후 스미나가 녀석의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곤 쓸쓸히 자전거를 몰았다.
땀나게 페달을 밟으며 생각했다.

'절대 열세'

 

체육행사가 있었다.
옆 반하고 배구 시합을 하기로 했다.

나 외모와 달리 운동 못한다.
배구는 티브이에서 조차 그다지 본 적도 없는 거 같다.

 

스포츠광인 스미나의 관심이 대단했다.
내가 가장 먼저 자원했다.

 

상대팀의 아르헨티나 출신이 배구를 좀 했나 보다. 혼자 날아 다녔다.
블로킹을 하자니 죽을 것 처럼 아팠다.

 

스미나가 주목하고 있었다.

공의 움직임을 따라, 난 미친 듯이 움직였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했던 기억이 없다.

 

잠시 쉬는 시간, 리나가 슬쩍 와서 따뜻하게 말한다.
'배구를 모르는 내가 봐도 차암 어설프다, 너.
 근데 정말 열심히 하는데? 나 감동했어, 스미나도 마찬가지 같은데?.'

 

일부러 스미나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아르헨티나 녀석의 눈빛은 승부욕으로 불탔다.
난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녀석의 강스파이크를 코트 뒤쪽에서 받으려다 턱을 강타 당했다.

 

전문응급요원, 스미나가 달려와서 살펴봤다.
난 괜찮다고 하며 경기 속개를 주문했다.

 

당연히 큰 점수 차이로 패했다.
그러나 우리 팀은 큰 박수를 받았다.

 

입안이 걸걸해서 침을 뱉자 피가 많이 섞여 나왔다.
스미나가 안타까운 소리를 내며, 다가와 입안을 살펴봤다.
그 손길에서 정성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입냄새가 날까 걱정되어 숨을 멈췄다.
스미나도 느꼈는지, 자상하게 웃으며, 편하게 하라고 한다.
서로 말이 잘 안 통했지만, 분명 그랬던 거 같다.

 

콜벳 모는 녀석이 근처에 와서 기다렸다.
스미나와 일본어로 대화를 제법 오래 했는데, 그에게 대충 먼저 가라고 하는 듯 했다.
녀석이 어이없게도 삐친 듯했다.  몸을 획 돌려, 차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그 유치함에 감사하며 생각했다.

'열세 만회'

 

난 탄력을 받았다.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응낙하는 그 눈빛에서 나에 대한 호감을 느꼈다.

 

살 떨리는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
스미나가 가장 저렴한 것을 주문했다.
차마 말릴 수 없었다. 확신은 못하지만, 음식값 걱정하는 나를 느낀것 같다.

대화가 줄어들면 서로의 감정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남녀 관계란 묘하다.
영어 초급반에서 만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커플이 뜨겁게 연애하는 것을 보면,
말이라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닌 듯하다.

스미나와의 소통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래서 난 과묵한 남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더 낭만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 같다.

 

나 역시 제일 싼걸로 주문했다.

 

아침에 당당히 스미나 옆에 가 앉았다.
이렇게 앉기까지 참 힘들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자책을 했다.

 

같은 반 형과 리나도 응원해줬다.
스미나가 보는 앞에서 그런 응원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쑥쓰러워서 내 행동이 위축됐다.

 

스미나는 스케즐이 나름 바빠 보였다.
방과 후 차마 데이트 요구를 못했고, 형과, 같은 반 일본인 케이네 기숙사에 놀러 갔다.

케이는 좀 특이한 녀석이다.
속내를 잘 안 보이는 보통 일본인과 달리 별말을 다한다.

내게 스미나를 좋아하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긍정하자, 경쟁자가 아주 많다는 충고를 해줬다.

나도 진작부터 느끼던 바다. 

 

스미나가 한국말을 배워 왔다.
내게 '옵-빠'라고 부른다.

얼결에 나이를 속였던 것이 참 불편했다.

그래도 오빠라는 말은 언제나 남자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이국의 연상에게 듣자니 기분이 묘했다.

 

스미나가 연신 내게 오빠소리를 하자, 리나가 의문을 제기한다.
내 나이가 밝혀 졌다.
난 그저 장난끼 있는 눈으로 쑥쓰럽게 인정하려 했는데
스미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스미나 개인 성격인지 일본의 문화가 그런지 거짓말은 용납이 안되는 모양이다.

 

애꿎은 리나만 원망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랭귀지 스쿨의 첫 8주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4주의 방학기간 동안, 여행도 다니며 아쉬움을 털어 내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자주 스미나를 생각했다.

 

미국의 식문화는 한식이나 일식과 많이 다르다.
무지하게 기름지다.
남자는 입맛이 맞지 않아, 야위어 가고, 여자들은 비만으로 맘 고생이 큰 경우를 많이 본다.

 

새 학기 스미나와 또 같은 반이 되었다.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비만 상태가 돼 있었다.
여전히 매력적이란 생각을 굳이 해봤다.

 

근데도 내 마음의 허전함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줄 몰랐다.

 

아직 어린 탓이리라...

 

간단한 일본어를 배워 스미나에게 나의 거짓말을 사과했고. 편한 급우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짧고 강렬했던 동경을 날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