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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적을 만나다 #2

새로운 여인이 기숙사에 나타났다.
옷차림이 티브이에 나오는 모델 같았다.
그러나 너무 야하다거나 무리하게 꾸몄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냥 멋있었다.
거기에 상당한 미인이였다.

그녀는 이미 학기가 절반이나 지나간 랭귀지 스쿨에 등록했다고 한다.
듣기론 이런 경우에도 학비는 그다지 할인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돈이 많나 보다.
분명치는 않지만 한국에서 무슨 대단한 집안의 딸이라는 소문이다.

모델누나는 모두에게 상냥했는데, 사람을 대함에 있어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항상 밝은 표정에 결코 가볍지 않았고, 늘 겸손한 말투였다.

모델누나를 보면서, 존댓말이라는 것이 상대를 높여주는 것 이상으로 자신도 높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존대말이 사람들로부터 어느정도 거리를 두게 하는 기능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랑 주로 어울리는 두 형들도 모델누나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듯 했지만. 어느 이상의 친밀감을 표시하기 어려운 묘한 기품이 있었다.
남자끼리 있을 때, 이 형들은 여자들을 쉽게 논평 해대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 누나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조심스러웠다.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새삼했다.

그렇다고 모델누나가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은 결코 아니였다.
적당히 애교스러운 면이 있어 주변사람들을 유쾌하게 해줬고, 특히 칭찬해 주는 것에 상당히 능숙했다.
별 같잖은 칭찬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형들을 보면서, 모델누나의 속에는 시커먼 마음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해보기도 했었으나, 속마음이야 어쨌든 존경스러웠다.
매력 넘치는 수수께기와도 같은 사람이였다.

홍이 한동안 소원했던 우리들 무리에 다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미 형들에게 여왕과도 같이 떠받들어지고 있는 모델누나를 에스코트하여, 한인슈퍼에 가려고 해도, 다운타운 나들이를 하려고 해도, 아웃렛 매장을 가려고 해도 자꾸 따라 나섰다.
형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용감히 따라 나서는 홍의 모습이 위태로웠다.

문득 느낀, 뜨거운 열정이 담긴 홍의 눈빛이 대단히 생소했다.

상식적으로 형들 무리에서 홍은 단연 군계일학이였다. 물론 나는 제외해야 하지만...
그러나 모델누나는 특별히 홍에게만 주목하지는 않는 듯 느껴졌다.
이런 모습이 형들을 즐겁게 했고, 홍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형들이 홍의 동행에 아량을 베풀 수 있었지 싶다.

홍도 어설플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지만 자존심을 굽히고 싶진 않았거나, 어쩌면 단순히 표현하는 것이 서툰듯 했다.
괜히 엉뚱하고 어려운 말을 지껄이곤 했다. 홍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다.

아울렛 매장에서 모델누나가 혼자 너무 오래 옷을 골라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눈치를 살피면, 형들은 옷고르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최대 숙원인 듯, 그녀에게 여유와 신중을 강력히 요구했다.

홍이 툭 한마디 던졌다.

'선홍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보는 이들의 눈을 쉽게 피로하게 할 수도 있어.'

이 무슨 어설프고 뜬구름 잡는 코멘트란 말인가..

홍이 이루기 힘든 강력한 욕망에 사로 잡혀 분별력을 상실한 것 같다.

예전의 그 냉철하면서도 담담한 모습이 아니였다. 안쓰러웠다.

최근들어 계속 여자들의 관심에 익숙해져 있다가 감을 잃은 걸지도 모르겠다.

모델 누나는 여느때와 달리 약간 성의 없이 반응했다.


'그치요? 역시 안목이 남다르시네요.'

그 말과 달리 표정이 무상했다. 미묘하게 차가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모델 누나도 홍의 심리상태를 느끼며 즐기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분명 냉기가 있었다. 흥미를 가지고 더욱 열심히 관찰했다.
그 밝은 얼굴을 자꾸 쳐다보다 보니, 홍을 앞에 두고 드문드문 드리워지는 차가움을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
그 차가움이 홍 앞에서 일상이 되는 순간, 홍은 지옥을 맛 볼지도 모른다는 억측마저 들었다.

... 역시 수상했다.
직감을 확인하고자 주변지인들을 탐문하기로 했다.
주변의 여자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하면서, 홍의 근황을 전하는 그녀들의 태도가 계절과도 같이 급변했음에, 듣는 내가 불편할 지경이였다.

적의를 가득 품고 전하는 소문들이기에 그 진위는 분명치 않았으나 대략 정리하면 이렇다.

홍이 모델 누나의 기숙사 방을 거의 리모델링 수준으로 인테리어 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실히 하던 아르바이트도 마구 건너뛰며 그녀의 사진 촬영을 해줬으며, 늦은 밤에도 수도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해댄다는 소리도 들렸다.

너무도 저돌적인 홍에게 그녀가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었다.
한편 그녀의 집안을 보고, 출세지향적인 홍이 인생을 올인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말은 믿지 않았다. 난 그의 눈빛에 담긴 순수한 열정을 확신했다.

때로 표독스럽기까지한 여자들의 눈빛을 보며, 난 내 우상의 몰락이 안타까웠다.

형들에게는 전하고 싶지 않은 뉴스였다.
홍과 소원해진 후 주위 여자들에게서 차츰 왕따가 되어가던 형들이였다.
이제야 모델누나가 여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이런 찌질한 형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납득했다.
또한 형들의 거북한 시선을 감당하며 접근해야만 했던 홍의 처절함을 동정했다.

*

저 잘난 모델누나에게 연인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역시나 한국에서 연인이 찾아왔다.

믿거나 말거나 소식통에 의하면 그는 상당한 자산가의 아들이였으나 현재 집안이 몰락한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많이 예민해 졌다고 한다.
예전엔 낭만을 즐기듯 분식집에서 떡볶이류도 찾았으나, 이제는 그런 제안에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보인다고 한다.
모델누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질러 피신하듯 이곳에 왔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그녀를 찾아 먼곳까지 쫓아온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귀공자 타입으로 옷차림에서 모델누나와 묘한 공통점을 느끼게 했다.
미리 들은 소문에 따른 선입견인지 그의 얇은 입술과 손가락이 예민한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형들은 귀공자에게 정중하고 깍듯했다. 그 광경은 마치, 모시고 있던 여왕을 베필에게 인계하는 머슴을 연상시켰다.
물론 한 사람 빼고...

홍은 귀공자를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말을 걸지도, 시선을 주지도 않고 철저히 부정했다.
이건 마치 첫째 아이가 갓 태어난 동생을 부정하는 모습을 떠올리게까지 했다.

하지만 귀공자도 홍을 무시할 수 있었다.
예민한 귀공자가 흥분할 조짐만 보여도 그녀의 말과 몸짓은 그를 달랬고 상대적으로 홍의 비참함은 더해 갔다.

그녀가 흐트러진 귀공자의 머리결을 고운 손결로 정성껏 다듬어주는 모습은 고통스런 현실이였을 것이다.

그 지적이고 점잖던 홍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고립되고 멀어져 갔다.
이제는 나의 관심마저 거부하는 까칠남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면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고,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누군가가, 그를 불법 채용했던 고용주를 고발했다.

어느 저녁 그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조차 못마땅한 누군가가 그를 두들겨 팼다.
항상 밝은 모델누나의 얼굴을 어둡게 하는 것만으로도 명분이 충분했나 보다.
자신의 여자가 아니더라도 여자앞에선 정의로운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이 남자의 마음임을 안다.

바로 그녀 앞에서 당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였다.

홍이 다른 지역 학교로 떠나는 날, 그를 배웅한 것은 나 혼자 뿐이였다.
그는 내 위로의 눈길조차 거부했다.
나 역시 그 마지막 자존심을 존중해줬다.
쓸쓸한 뒷모습을 향해 난 기원했다.

'그 곳에서는 홀로 강적이 되길... 다시는 강적을 만나지 말기를...'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유치한 형들과는 결별하기로...

이제 강적이 사라진 공허한 커뮤니티를 달래줄 사람이 달리 있을리 없다. 시대가 나를 요구했다.
그 동안의 탐문에서 특히 열심으로 응해주었던 샌디를 찔러보리라 생각했다.

문득 옛 성현이 전하는 지혜의 말씀이 뇌리를 때렸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