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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 #2


늦은 밤 커피샾에서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 일상을 조리있게 늘어 놓았고, 난 주로 들었다. 흥미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야한 스타일 답게 알고 있는 남자도 많은 모양이다.
늦은 시간에 내게 커피샾을 가자고 제안한 것도 딱히 내게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늦은 귀가가 습관이기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긴 손톱을 덮은 짙은 매니큐어를 보며, 역시 내가 감당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심없이 친구처럼 지낸다는 숱한 남자들, 익숙치 않은 옷차림과 짙은 화장, 거기에 연상...

패러다임을 바꾸기로 했다.
내가 아는 형을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녀도 아는 후배를 주선해 주겠다며 흔쾌히 수용했다.
계약이 성립된 셈이다.
갑자기 그녀가 말을 놓으며 편하게 지내자고 한다.
말투에서 은근히 묻어나던 교태가 사라졌다.
별 재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편하게 하니 거리감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친밀감마저 느껴졌다.

난 새로운 관계설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난 지극히 상식적이다보니, 누나 정도의 미모는 감히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가급적이면 이쁜 동생으로 해줘!'
바짝 수그렸다.

며칠 후 저녁
동문선배와 인천에서 함께 만났다.
그녀와 어울릴만한 선배라고 생각했다.
바짝 마른 체구에 예민한 성격이지만 내 주변에선 드물게 꾸미고 다니는 남자였다.
말투가 사근사근했고, 가끔 차갑다는 느낌을 주지만,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편이다.

그녀도 후배와 같이 나왔다.
옷차림이나 스타일은 그녀와 비슷한 듯 보였지만 외모는 한참 떨어지는 듯했다.
상심했다.

약간 내성적이였던 선배는 처음부터 그녀에 대한 깊은 호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도 선배가 괜찮은가 보다. 차분하고 조용조용하게 이야기하는 양이 남성 접대모드에 들어간듯 보였다.
예의 그 교태 섞인 목소리가 돋보였다.

원래 조용한 편인 선배는 그다지 말이 없었다.
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열심히 떠들어대야 했다.

'에이~ 포기가 쉬워? 난 국가고시 4수해서 결국 붙었거든?, 중간,중간 정말 때려치고 싶었지만, 나도 내 자신의 의지에 놀랬어'
'와! 어떤거 붙었는데?'

'운전면허 필기시험'
나도 굳이 망가지기 싫었지만, 선배형을 위해 나름 노력했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후배는 이미지와 달리 조용했다.
가끔씩 어렵게 진지한 질문을 내게 던졌지만, 끌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후배와 눈만 마주치면 갑자기 서먹서먹해졌다.

어쨋든 그녀는 장시간 숙녀로서의 면모를 훌륭히 소화해 냈고, 그녀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은 갈수록 생기가 넘쳤다.

저녁을 먹고, 술 자리까지 파한 후, 난 집에 가고 싶었으나, 동문선배는 다음 갈 곳을 묻는다.
그녀가 나이트를 이야기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동문선배 눈치를 안 볼 수 없어, 몸치 임에도 나이트를 가야했다.

그녀의 춤새에 기가 막혔다.
나이트 전속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근처에서 괜히 어설픈 몸짓 하기도 부담스러워 멀찍이 물러나고 싶었다.
선배형도 나름 멋있어 보이려 어색한 춤동작을 마구 펼쳐보였다.
둘이 나름 죽이 맞는 것도 같았다.

스테이지를 드나드는데 어떤 남자가 몇번인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인간의 체구가 너무 건장해 어쩔수 없었다.

나이트장을 파하고 계산을 하는 선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오자, 그녀 일행이 아까 잠시 말을 섞었던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충 모습을 보니 원래 구면이였던 모양이다.
약간 멀찍이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았다.
선배가 짜증을 냈지만, 차마 나서지는 못하는 듯했다.

짧은 머리에 우람한 체격, 나이도 제법 들어보였고, 굵은 은목걸이가 왠지 위압적인 느낌을 줬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는데, 살 떨려서 접근할 자신이 없었다.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은근히 내가 나서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대학과 고교 선배다...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아갔다. 딱히 생각한 건 없었다.
다가가며 얼핏 들으니, 자동차 운전해서 여행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당시 대중교통만 이용하는 학생이였던 내겐 또다른 거리감이였다.
내가 근처에 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그 남자가 불쾌했지만 말할 용기가 안섰다.
그녀도 왠일인지 계속 그 남자의 이야기만 신경썼다. 당혹스러웠다.
남자의 손에 들린 묵직한 열쇠꾸러미에는 자동차키도 포함돼 있는 듯 보였다.
나를 힐끔보고 다시 얘기를 이어가는 남자의 태도에 순간 발끈했다.

그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할꺼야?'
남자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쏘아봤다.

난 여전히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대했다.
결코 위축됨을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그가 참는다는 듯 과도한 모션으로 돌아서 갔다.
그 모습에 긴장이 확 풀렸다.
돌아서 가는 남자를 보며 왠지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다시 합류했고, 난 여기서 갈라지자고 했다.
난 그녀의 후배와 시내를 조금 걷다가 택시를 태워 보냈고, 피곤했던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동문선배가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동문회에도 나오지 않아, 선배의 동기에게 안부를 물었다.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동문선배가 어떤 여자에게 홀려서, 신용카드도 만들고 자동차도 사고, 하와이에도 놀러 갔다고 한다.
재원 마련을 위해 집에 전세 얻어달라고 떼써서, 전세금 날려먹고, 요즘은 유흥비와 명품쇼핑비 마련을 위해, 별 잡입을 찾아 다니느라 학교에서 보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등록금도 빼돌렸을 거란 추측도 있었다.


내가 졸업하도록 그 선배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교양수업시간에 미필적 고의라는 어려운 말이 나왔다.
갑자기 그 선배형이 생각났다.

내게는 미필적 고의의 혐의가 없다고 결론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