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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티스트 #1


친구 명준

큰 키에 고집스러운 인상논리적이고 합리를 추구하지만 고지식한 면이 강한 샌님 스타일이다.
정해진 질서에 쉽게 순응하고 성실한 생활에 익숙하다
.
지난 대학시절 동안, 그에게 연애는 늘 어렵고 요원하기만 했던 얘기였다.

 

그는 이제 군대를 막 제대하고, 계획했던 바, 고시공부에 매진할 것이다.
상경해서 자취방을 알아보고 수험서를 정리하는 어수선한 과정에서 난 그에게 소개팅을 주선했다.

 
커피샾에서 같이 기다리고 있는데, 명준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자한테 충분히 어필할만한 마스크가 무색해 보였다.

 

나 역시 처음 보는데, 상대는 그리 미인이 아니였다.
작은 키에 활달한 인상이였고, 쌍거플 없는 눈이 단아하다는 느낌을 줬다.

 
그녀는, 아무말없이 묵묵히 있는 명준에게 상당한 호감을 보였다.
초면의 낯선 분위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 그녀가 적극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
애교가 넘치고 말도 잘했다.

 

'어쩜~ 손이 그렇게 커요.. 내 얼굴 다 덮겠어요. 호호'

 

여자의 적극적인 관심이 아직 명준에겐 익숙치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그의 침묵이 관심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
늘 여자앞에서 할 말 없이 어색했기만 했던 친구이기에, 그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웃어주는 그녀는 분명 좋은 콤비같았다.

둘이 사귈 듯 보였다.

근래 명준의 얼굴이 복잡해 보였다.
고지식한 심성답게, 공부와 연애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느껴졌다
.
그러면서도 데이트는 자주하는 눈치다
.
늘 여자에 대한 응대가 힘들었던 그에게 그녀와의 시간은 새로운 경험이였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러 갈 때 그 해맑은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였다.
순수한 이상주의자인 그에게 그녀는 구원의 천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자주 연락을 하는 듯 보였다.
명준의 호출기가 빈번하게 울려댔다.

무슨 숫자로 암호같은 것을 주고 받는지, 호출기를 들여다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호출기 액정이라봐야 숫자밖에 없을 텐데... 나한텐 보여주지도 않는다.

 

반면 가끔씩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얼굴엔 수심이 깊어보였다.
고시에 대한 부담이라고 짐작됐다.

 
얼마 후 명준이 밝은 얼굴로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고시공부하는 동문선배들과의 술자리에 그녀를 불렀나 보다
.
원래는 동문선배들에게 고시준비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는 자리였는데
,
그녀의 연락이 왔고, 선배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선배들의 총평은 긍정적이였다.
결코 이쁜 것은 아니라고 몇번이나 강조하면서도 애교가 넘치고 깜찍해서 너무 괜찮다는 것이다
.
아마 그녀는 그날도 역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은 신경도 쓰지 않은채 오직 명준만 바라보며 낯뜨거운 닭살멘트를 마구 날렸을 것이다.

 

'우리 오빠, 학교에서는 어때요? ~ 궁금하다...'
그녀의 말투를 흉내내는 명준의 말투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렇게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니 power of love 라는 단어가 연상됐다.

선배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굳건하게 해준게 아닐까 싶었다.

 

*
또 다른 친구의 생일을 맞아 커플로 조촐하게 모이게 되었다.
명준도 당당히 누군가를 대동하고 갈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모임에서 간단한 게임을 했는데, 센스가 좀 부족했던 명준이 꼴찌를 했다.
벌로 키스를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순간 나도 긴장됐다.

 

명준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그녀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얼굴을 포개는 명준의 온 몸은 한눈에도 경직돼 보였다.

내가 앉은 쪽에서는 명준의 뒷통수와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그 표정이 너무 애로틱했다.
수줍어 하는 모습을 찾을수가 없었다
.
그녀에 대한 기존 이미지와는 많이 달라보여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였지만 명준에겐 생애 첫키스였다.

 

다음날 명준은 얼굴이 잔뜩 부어 있었다.
어제 잠을 못 잤다고 한다
.
나의 웃음에 기분 상했나 보다
.
짐짓 어제의 입맞춤과는 상관 없다는 투로, 불면의 이유를 엉뚱한 동네 소음에 갖다 붙이는 양이 어색해 보였다.

 

그날 이후 명준이 확연히 달라졌다.
마치 꿈길을 걸어다니는 듯 보였다
.
어울리지 않게 '사랑'이라는 단어도 가끔 사용했다.

아마 요즘 진도가 잘 나가는 게 분명해 보였다.


명준과 학교 연못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담한 연못이 시월의 낙엽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는데 명준이 혼자말 하듯 얘기했다.

 

'저기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키스를 하며 살까?'

 

난 자연스럽게 무심히 반응했다.
'
어디서 했는데
?'
'
비디오방 ...'

 

명준은 얼껼에 대답해 놓고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까지였다. 더이상 통하지 않았다. 명준이 더이상의 빈틈을 보이지 않아
,
집요한 탐문체제로 전환했지만 결코 더 자세한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명준의 깊어가는 눈과 차분해진 행동을 보며, 마치 항시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제 그가 그녀를 진정한 연인으로 규정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행복에 들뜬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연애경험이 전무한 명준에게 너무 빠른 진도는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
그녀도 명준처럼 순수할지 의심이 됐다.


*
최근 명준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졌다.
이유를 물어도 별 반응이 없다
.
책을 앞에 두고도 그다지 집중을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에게 허락된 연애의 절정기가 벌써 기울어 가고 있는 듯 했다.
너무 짧았다.

 

며칠 후 명준이 술 한잔하자고 했다.
상심한 모습이였다.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한다.
근데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란다. 그녀가 진실되지 못하다는 말도 했던 거 같다.

명준은 호출기의 음성메세지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고, 그녀의 호출에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음성메세지에는 황당하다는 말뿐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호출이 중단되자 더욱 고통스럽다고 푸념했다.

 

난 이별통보의 분명한 이유를 밝히라고 했지만, 명준은 그다지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