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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티스트 #2


 

다음날 명준은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 눈빛엔 초조함과 좌절이 가득했다.

 

난 의식적으로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니가 그만 만나자고 했다며...  다시 만나고 싶으면 니가 연락해야지,
 당연한거 아니야? 정중하게 사과해'

 

명준의 눈이 짧게 빛났다.

'별 관심없는 남자한테라도 그런 소릴들으면 기분 좋을 여자가 어딨겠어? 빨리 가서 화 풀어줘라.'

명준이 정말 어디론가 빨리 사라졌다.

 

명준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전화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의 표정으로 짐작할 뿐이였다.
그날 같이 술을 많이 먹었다.
명준은 군대이야기, 고교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다.
늦게까지 과음한 탓에 명준의 자취방에서 잤다.

 

새벽 무렵, 담배냄새에 잠이 깼다.
벽에 머리를 붙이고 담배를 피고 있는 명준의 모습이 안돼 보였다.

 

난 다시 누웠는데, 명준이 혼자말 하듯 담담하게 지난 일을 이야기해줬다.

 

그녀와의 키스가 너무 좋았다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거 같았다고.
그 후 그녀의 집앞에서, 커피샾의 어두운 구석에서, 지하터널에서 둘은 수시로 키스를 했다.
머리 속 가득 그녀를 생각했고, 그녀와 늘 함께하는 상상을 했다.

황홀함에 정신 못차리던 어느 순간 명준은 느꼈다.
처음과 달리 그녀가 마음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뜨거워 지고 있는 자신과 달리, 그녀에게선 분명한 권태감이 느껴졌다.

명준은 믿겨지지 않아 몇번이나 확인했다고 한다.
그녀는 여전히 만져졌고, 입술의 촉감도 비슷했으나 확연히 드러나는 느슨한 느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즈음에는 함께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걸어도 그녀가 예전처럼 발랄하지도,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부정할 수 없지만, 애매하기도한 느낌에 초조해졌을 것이다.

명준은 그녀를 되돌릴 수 있길 바랬다.

그래서 차츰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고, 그에 비례해 그녀는 더욱 말이 줄게 되었다.
애써 늘어 놓는 명준의 구구한 말들은, 은근히 느껴지는 냉담한 그녀의 눈빛 앞에서 무력할 뿐이였고
공허한 침묵의 시간이 늘어만 갔다.

그가 애태우는 눈빛을 드러낼수록, 그녀는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현상황에 대해 짐짓 모른 척 별 언급도 없었다고 했다.

명준은 정말 망설여지고, 하기 싫어지만, 결국 질문을 하고 말았다. 굴복하는 기분이였다고 한다.

'예전같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거야?'
못 들은 듯 흘려버리는 그녀의 눈빛엔 차가움이 완연했다.
말 하지 아니한만 못했다.

 

명준은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고 싶은 듯, 그녀의 집앞에서 뜨거운 키스를 시도했다.
그녀는 선.심.쓰듯 순순히 응했다.
그때의 비참한 기분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다고 한다.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고, 불면의 밤은 명준을 지독히도 괴롭혔다.
마침내 견딜 수 없던 명준은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 후 그녀의 음성메세지에는 황당해 하는 내용뿐이였다.
자신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그녀의 냉냉한 음색이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그부분에서 난 그의 말을 끊었다.

'넌 니 괴로운 것만 알고, 그 애 기분은 생각하지 않냐? 뺨 맞고 웃는 여자 봤어?'

난 이미 속으론 명준이 그녀와 헤어진 것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엽적인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근데 내 말을, 명준은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잠시 후 또 다시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어차피 명준이 겪어야 할 일이다.
테크니컬한 조언을 생각해 봤다.

 

먼저 정중히 사과할 것, [잠깐 봤으면 해]라고 짧게 말하고 더이상의 구차한 말은 절대 하지 말 것, 당당할 것.
이정도 였던 거 같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난 그를 응원하며 섰다.
전화 버튼을 누르는 그의 굵은 손마디가 힘에 부쳐보였다.
그렇게 약속을 잡는데 성공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명준의 발걸음이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이상을 꿈꾸는 낭만주의자에게 그녀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명준은 그녀와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줬다.
자신은 그녀 역시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냉정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더 이상의 어떤 응대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명준의 표정이 제법 차분해 보였다.

 

난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버렸다.

'남녀가 바뀐 것 같다. 반대의 경우는 가끔 봤는데,  참 특이한 남녀다. 니네는...
 그렇게까지 됐다면 어쩔 수 없다. 딴 여자 알아봐라.'

명준은 나의 이런 면이 싫었을지 모른다. 내가 말을 너무 쉽게 했던거 같기도 하다.


명준이 그녀와 함께 했던 것은 시월과, 십일월을 걸치는 짧은 시절이였다.
몇 해동안 그 무렵이 되면 명준의 얼굴에는 제법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 지곤 했다.
짧은 만남이였지만, 명준은 몇해가 지나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였다고 이야기했던 거 같다.


명준은 당당히 고시에 붙었고, 요즘 잘나간다. 평범한 샐러리맨인 난 그가 부럽다.

 

한편 그녀는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시시한 남자'와 만나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