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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언니 #2


당시 나는 자금업무를 했는데, 왕언니와 업무상 연계되는 것이 많았다.
난 왕언니한테 잘했다.
꼭 냉장고 발언때문만은 아닌것 같고, 왠지 모를 호감이 분명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나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한테도 대체로 친절한 편이였다.
접수자료에 보완이 필요하면,  그 사유를 명분에 맞게 충분히 설명주었고, 특별히 왕언니에게는 서류를 직접 챙겨주는 등,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권위적이고, 깐깐한 경리팀원들과 달리, 나름의 친절한 이미지를 갖췄다고 생각된다.
 
은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은행 근처의 관공서에도 왕언니를 위해 대신 가주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는 붙임성 있게 실실 웃으며 농담도 자주 건넸다.
왕언니가 싫다는 느낌을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차차 업무시간 중에도 왕언니와 농담을 주고 받게 되었다.
왕언니와 가깝게 되면서, 왕언니가 회사에서 상당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왕언니를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여직원들 앞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상사조차도 함부로 터치할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지만, 그 대가는 외로움이였다. 웃음을 지어 보일 일이 그다지 없었던 거 같았다.

그래서인지 왕언니도 나한테 잘해주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복지포인트나, 복지차원에서 제공하는 영화티켓, 레스토랑 할인권등에서 사전정보나 활용팁, 스케즐 안배 등, 보이지 않는 우대를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들이대는 냉정한 적용 잣대에서 열외되기도 했다.
또한 회식자리에서도 내 썰렁한 농담을 왕언니가 주목해 주다보니, 모든 여직원들이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어느날 왕언니가 협조를 요청한 업무에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그 사실을 접한 왕언니가 순간 폭발했다.

 

'이걸 그냥 이렇게 주면 어떡해?'

  

일부러 대꾸를 안했다. 늘 붙임성 있던 내가 평소와 달리 반응이 없자, 미안했나 보다'

'아니 내가 화를 내는게 아니라... ... 할 수 없지 뭐.'

나를 대하는 왕언니의 태도가 총무팀장에게 이채로웠나 보다.

나중에 조용히 음료수를 사면서 어떻게 왕언니의 노여움을 타지 않을 수 있냐며, 그 비결을 물었다.
비결은 나도 모르겠다. 그냥 [호감]을 가지고 편하게 대했을 뿐이다.

평소답지 않게 처진 모습을 보고, 왕언니한테 캔음료 하나를 슬쩍 건네주며 능청을 떨었다.

'이거 제 마음입니다. 꼭! 반드시 혼자 드세요'

잠시 후 다시 인사총무팀 앞을 지나가는데, 왕언니가 다른 누군가와 음료를 컵에 따라서 나눠 먹고 있었다.

아까 한말도 있고 해서 그냥 지나치기 뭐 했다.
'엇?'
적당히 인상쓰며 황당해 하는 내 모습에, 왕언니는 벽으로 숨는 시늉을 하며 즐거워 했다.

'어머 어쩍해... 호호 미안해, 내가 다음에 하나 쏠께'

'난 [솔]로 쏘세요'
([솔] 회사매점에서 제일 비싼 음료)

그날 오후, 왕언니는 마케팅팀으로, 경리팀으로 여직원들을 찾아다니며 나와 했던 대화를 혼자 재연해 보였다.

눈을 찡그리면서 '난 [솔]로 쏘세요'하며 내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내는 양이 퍽 밝아 보였다.

사람들도 왕언니의 익숙치 않은 모습이 신선했을 거다.

오랜 직장생활에 피로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진 케리어 우먼은 외롭다.

그를 즐겁게 해주면, 자신도 즐거워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