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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팀 여직원 #2


난 대체로 사람들에게 친절한 편이다.

또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결코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대체로 웃음으로 응대하는 습관이 있긴 하다.

업무상 문제가 발생하거나 곤란한 경우가 생겨도, 누군가가 아쉬운 소리를 해도, 대체로 웃는 편이다.


이제 나의 밝은 응대 대상에서 그녀를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

그녀에게 업무 이외엔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유쾌한 립서비스를 마구 날렸지만, 의식적으로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옆자리에 같이 앉아 있다보니, 확연히 달라진 나의 행동에 그녀가 제법 동요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 그녀가 무책임하진 않아, 일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그녀는 긴 생머리가 인상적이였다.
옷은 늘 화려하게 바뀌었지만 머리스타일은 항상 같았다.

 

그런데 어느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숏컷을 하고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이였지만, 마주친 그녀의 눈빛에는, 나의 코멘트를 요구하는 강렬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미 냉담하게 대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내 눈빛은 일말의 이채조차 담지 않았다.
의외의 광경에도 전혀 놀라움을 드러내지는 않는 태도는 대학시절 이미 마스터했던 바다.
무관심과 냉대의 기본은, 지극히 짧은 순간의 눈빛에서조차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반응없이 자리로 와 앉는 내 모습이 꽤 신경쓰이는 듯 느껴졌다.

숏컷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나의 무시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듯, 그녀는 사람들의 반응에 크게 웃으며 반응했다.
그 과도한 반응의 크기만큼 쓸쓸함의 크기도 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외근을 하면서 자금이체를 부탁했다.
이럴때일수록, 내가 아쉬운 부탁은, 당연한듯 뻔뻔하게 해야 한다.
아쉬움을 보이는 순간, 애써 펼쳤던 연출은 수포가 될 것이다.

 

풀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역시 몇 주를 냉담하게 대했더니, 여직원이 많이 겸손해 졌다.
나를 대하는 목소리에서 차가움은 사라졌고, 조심스러움이 듬뿍 담겼다.
그런 태도에 내 마음이 누그러졌다. 역시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연착륙을 하기로 했다. 원래 내 성품이 모질지 못하다.

하지만 자연스러워야 했다.
어설픈 사면&복권은 지난 몇주의 수고를 허사로 만들 것이다.

 

사고가 터졌다.
내가 이체를 부탁한 지급요청서에는 2억3천8백이 적혀 있었는데, 여직원이 2억8천3백을 이체해 버렸다.

퇴근무렵 시재를 맞추다 발견했고, 여직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체상대방이 주거래은행이였다는 것이다.


서둘러 은행에 마감 유보를 부탁하고 은행으로 달려가 과잉송금액만큼 수표를 발행받아 회사 계좌로 재입금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 전표증빙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여전히, 임원결제가 요구되는 계좌의 입출금내역서에, 여직원의 실수가 명백하게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여직원은 계속 안절부절 못했다.

사실 이런 금융사고라면 당연히 담당자인 내 책임이 더 크다.
시말서를 쓰더라도 업무를 대행시킨 내가 써야할 것이다.

 

난 사고를 발견한 순간부터 처리할 때까지 그 어떤 원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짜증스런 표정하나 짓지 않았다. 
솔직히 속터졌다. 난 덜렁대는 성격이었지만, 이체할 때만큼은 아무리 소액이라도 다섯번 이상 확인을 했다.
여직원이 이렇게 대충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미 벌어진 사고 책망해봐야 도대체가 소용이 없다. 상대의 미안했던 마음만 식어버리게 하기 십상이다.

최근 잦은 실수로 팀장한테 연일 꾸지람을 들어온 여직원은 완전히 주눅들어 있었다.
난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격려했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그녀에겐 결코 어떤 책임도 없음을 확언해줬다.


비로소 내가 그녀의 진정한 상사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였다.

 

입출금내역서를 직접 조작했다. 걸려도 이젠 완전히 내 책임이다.

난 결코 온정적이지 못하다.

닥쳐온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생각할 뿐이다.
떡을 줄때 으스대며 주는 것보다, 말없이 따뜻하게 주는 것이 떡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내가 원래 얍샵하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