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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팀 여직원 #3


그날 이후,
여직원이 나를 잘 따랐다.
순수한 만큼 일단 마음을 여니, 태도가 순식간에 변했다.

 

건네는 말에는 정감이 담겨졌고, 아침에 출근하면 미소로 맞아줬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게 상의했고, 도움도 당연스레 요청했다.
사무실에서 대화가 늘어나자 한결 웃는 모습도 많아 졌고, 친밀감이 느껴졌다.

여전히 타부서사람들에게는 냉냉했지만 미소를 짓는 일이 조금씩 늘어났다.

여직원에게 바로 제출하기 곤란한 일이 생긴 사람들은 내게 중재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유월씨, 내가 이거 깜빡했었다. 어떡하냐? 니가 이거 어떻게 좀 해주면 안돼?'

원리원칙을 지키기 위해선 총대를 매고 악역을 담당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여직원이 기꺼이 악역을 수행하다 보니, 난 중간에서 속 편하게 대외 이미지 관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여직원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중재하려고 애썼다.

 

반대로 여직원이 보여온 태도로 인해, 여직원이 타부서에 대하여 아쉬운 경우가 생기면, 그녀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런 경우에도 난 어렵지 않게 타부서의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중재야말로 내 직장생활의 경쟁력이였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여직원이 악역을 맡아준 덕을 많이 봤다.

 

그렇게 점점 시간이 가자, 그녀는 업무적인 것은 물론, 업무 외적인 부분까지 내게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성심으로 그녀를 배려하곤 했지만, 가끔 내게 연정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팀 회의를 하는데 갑작스런 업무가 생겨서 일정이 빡빡해졌다.
여직원이 내게 주말에 함께 나오자고 제안했다.
제안을 할때 여직원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여직원은 그날 오후 내내 삐져서 말이 없었다.

 

여직원의 업무 중엔 분기에 한번씩 부가세 신고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으례 야근을 해야 했다.
난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가곤했다. 그걸 서운해 하는 것을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부담스러웠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다보니, 그녀의 전화통화나 다른 여직원과의 대화를 의도하지 않게 접하기도 쉬웠다.
남자친구 있는 거 다 알고 있는데, 내 앞에서 의식적으로 없는 척했다.

어느날 회사회식을 마치고 여직원과 함께 나오는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친구와 마주쳤다.
그녀가 애꿎은 남자친구에게 짜증을 냈다.
나를 의식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일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 날이후 남자친구 없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언젠가 일 도와줬다는 것을 이유로 자꾸 한턱 쏘라고 했다.
결국 저렴하게 분식집에서 사주기로 하고 은행가는 길에 동행 시켰다.
사실 퇴근 후에 둘이 만나는 것은 왠지 부담스러웠다.
추운 겨울날이라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도착해보니, 마침 분식집이 문을 닫았다.
갑자기 여직원이 화를 내더니 혼자 가버렸다.

철없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처구니 없을 때가 많았다.
친밀감이 더해지자, 여직원은 웃기도 더 잘했고, 신경질도 자주 내기 시작했다.

 

또다시 대응에 나섰다.

여직원이 간혹 부당한 짜증을 부리면, 일정한 시차를 두고, 은근슬쩍 인상을 쓰거나 나홀로 화난 기색을 보여줬다. 가끔 서류나 볼펜을 던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안볼때 여직원의 인지범위내에서 내 책상 위에만 소리나게 던졌다. 그녀때문이라는 확신이 안들도록 애매하게 연출했다. 시차는 반드시 뒀다.

 

상대의 숨소리까지도 들릴 정도로 가까이 앉아 있다보니, 나의 시위가 행해지면 그녀는 확실히 반응을 보였다. 조심스러워지고 내 눈치를 본다.
그럴 때면, 내 잔심부름도 아주 잘해줬다.

 

나도 아직 어리다보니 차즘 그게 맛들렸던 거 같다.

인상을 쓰며 별 잡다한 잡일을 시키다 보니, 점점 그녀는 내눈치를 더 살피게 되는 듯 싶었다.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존경하던 기존 본부장님이 다른 회사로 가시고, 신임 본부장이 왔다.
악명이 대단했다. 대답을 잘못하면 서류를 집어던지는 것이 다반사라고 한다.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신임 본부장 환영식날, 2차로 단란주점에 갔다.

1차 때부터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얼어서 분위기가 계속 썰렁했다.
본부장의 훈하!말씀이 끝나고 몇분이 지나도록 모두 조용하기만 했다.

 

내가 스타트를 끊었다. 그러고 싶었다.
음악이 나오자, 마이크를 쥐고 당당한 자세로 포즈를 취했다. 여직원이 호응하여 화이팅을 외쳤다.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 무대로 데려왔다.

 

총각답게 부당한 권위에 맞설 수 있던 시절이였다.
삭막한 본부장에게 반기라도 들 듯, 몸을 마구 흔들어대며 고래고래 락을 불렀다.
여직원도 옆에서 신나게 보조를 맞춰줬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본부장이 친히 술병과 잔을 들고 나와 치사를 했다.
어려운 자리에서 기꺼이 호홉을 맞춰준 여직원에게 진한 동료애를 느꼈다.

갑자기 분위기가 살았고, 여직원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어 노래가 이어졌다.

 

흥이 오른 본부장이 무대로 올라서자 모두가 서둘러 무대로 뛰어나왔다.

본주장이 노래를 흥얼거리자, 팀장이 여직원의 마이크를 냅다 빼앗아 본부장에게 머리숙여 바쳤다.

여직원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리며 무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날 같이 술을 많이 마셨다.

너무 늦어, 난 친구 자치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도 같은 방향이라 택시를 함께 탔다.
나란히 뒷자석에 앉아 가는데, 아까부터 느껴졌던 그녀의 애뜻한 눈빛이 자꾸 신경 쓰였다.

 

역시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순수하다. 이열치열로 받기로 했다.

능청맞게 손을 쓱 잡았다.

 

그녀가 안어울리게 수줍은 표정을 보이며 황급히 손을 뺏다.
근래엔 반말을 쓰더니 갑자기 높은 톤의 존대말을 한다.

 

'어머, 뭐에요?'
'...남자 친구,  있다고 그랬나?'

'... ...네, 있어요'
'응. 내가 실수 했어. 미안해. 다시는 안그럴께'

 

이렇게라도 선을 긋고 싶었다. 나에겐 동료였을뿐...  

 

내가 먼저 회사를 그만 뒀다.
그 후에도 가끔 연락이 왔다.
수년이 지나 결혼소식도 들었고, 안부전화도 가끔 받았다.

한번도 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돌잔치 연락을 받았을 때는 좀 미안했다.
마치, 내가 안올것을 안다는 듯한 늬앙스엔 서운함이 베어 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이기에 잘해준다는 것과 바로 '당신'이기에 잘해준다는 것.

 

사람에 따라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