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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일 없었다는 듯...


친구 현중에게 드디어 여자친구가 생겼다.
한 2주전부터 만나는 여자가 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사귄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고 자평한다.
내게도 곧 소개팅을 주선해 주겠다는 친구의 얼굴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소개팅 당일, 학교앞 커피샾에서 현중과 일찍부터 가서 잡답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현중은, 내가 눈이 높다고, 여자친구에게 몇번이나 당부해두었다며,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현중의 여자친구가 일단 혼자 왔다.
친구와는 연락이 엇갈렸는지, 좀 나중에 온다고 했다.

 

현중의 여자친구는 웃는 얼굴에 활달하고 말이 많은 스타일이였다.
깜찍한 외모였는데, 심중의 생각은 말로 꺼내 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듯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 혼자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별 고민이나 생각없이 속편하게 사는 사람 같았다.
단순한 거 같기도 하고 약간 푼수같기도 했지만 귀여운 면이 있었다.
어쩌면 백치미라는 것이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성적인 현중과는 잘 어울리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면임에도 백치미는 내게 스스럼없이 편하게 말했다.
'서경석이랑 많이 닮았네 호호'
'면티가 꽉끼네, 운동 좀 했나봐 ㅎㅎ....'

 

소개팅에 대비해서 잔뜩 무게 잡고 있으려 했는데, 도무지 도움을 안준다.
여자가 웃으며 건네는 농담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럭저럭 장단을 맞춰주다보니,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금방 자연스럽게 풀렸다.

 

현중이 오늘 소개팅에 나올 애에 대한 질문을 했다.
백치미는 그다지 관심없다는 듯,
'곧 올텐데 직접 만나봐'  하고는 또 다시 내게 엄한 질문을 한다.
그 무책임한 대답이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백치미의 호출기가 울렸고, 그녀가 나갔다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의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한 눈에도 실망스러웠다.
현중은 난처한 듯, 몇번이고 내게 미안한 눈짓을 보냈다.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여자는 역시 자신보다 괜찮은 사람을 데리고 나오기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들어갔다.
 
백치미는 이 자리의 성격이 소개팅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듯 했다.
자신의 친구는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구석에 방치한 채 신경도 안쓰고 우리와의 대화만을 이어갔다.
황당했다. 둘이 별로 안친한 듯 싶기도 했다.

 

백치미의 친구는 얼굴가득 못마땅한 표정이였는데, 원래 사회성이 좀 없어보였다.
전혀 대화를 안하는 것도 매너가 아닌 거 같아, 억지로 한마디 건넸다.
'집이 어디에요?'

 

톡 쏘듯이 짧게 반응하고 만다.
'그냥 먼데 살거든요'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소개팅 형식은 증발해 버렸고, 백치미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백치미가 노래방을 가자고 했다.
난 회의감만 드는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백치미의 친구와 함께 따로 가보겠다고 했으나, 백치미는 모두 함께 갈것을 제안했고, 그 친구 역시 선선히 따랐다.

 

백치미는 노래방에서도 혼자 잘 놀았다.
낯뜨거운 율동과 오버액션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노래의 분위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이 압권이였다.
어떻게 보면 참 순수한 거 같기도 했다.

 

백치미의 리드에 압도된 현중과 나는, 백치미와 어우러져 춤추며 노래했다.

백치미의 친구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뾰로뚱한 표정으로 팝콘만 죽이고 있었다.
노래도 안하고, 말도 안하고, 그런데도 아까는 왜 기꺼이 따라온 건지...  백치미와는 어떤 관계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백치미가 수상했다.
내가 노래를 부를땐 감탄사를 연발하며, 환호를 보내더니, 현중이 노래를 하면 화장실을 가거나, 내게 말을 거는 등, 딴청을 부렸다.
다시 마이크를 잡는 내게 백치미가 말했다.
'이번엔 또 어떤 멋있는 노래를 부를까...'


현중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나도 당황스러웠다.

당혹스런 마음에 노래가 엇나가서 부르는 둥 마는 둥 하자, 백치미가 또 다른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살렸다.
어색한 듀엣을 부르면서 난 현중을 쳐다봤고, 현중은 담담한 표정이였다.

노래에 몰입된 듯한 백치미의 과장된 표정이 재미있었다.
노래를 정말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노래방을 나와서 난 이만 갈라지자고 했다.
백치미가 짜증을 냈다.
소주방에 가서 가볍게 한잔하고 다 같이 헤어지자고 한다.

 

거참... 난 분명히 단호하게 뿌리치고 갈 수 있었다.

그러지 못했다.  아니 분명 '그러지 않았다'가 맞다.

그 짜증내는 표정을 접하고, 조심스레 따라나선 나의 행동을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였던 백치미의 친구는 별 이의가 없는 듯 보였고, 현중은 여전히 무표정이였다.

  

소주를 제법 마셨다.
백치미는 벌써부터 취한 듯 보였다.

'너같이 멋있는 애를 만나서 너무 기뻐'
술 취한 듯 농담처럼 흘린 백치미의 말에 술이 확 깼다.
현중은 계속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다시 술을 제법 마셨다.
몽롱한 눈에, 천진한 듯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거참... 친구 때문이 아니더라도, 난 백치미에 별 관심이 없었을 거다. 결코 내 취향이 아니다.

근데 묘하게 느껴지는 이 흥미는 무엇인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몸을 가누기 힘든 듯, 백치기가 술병을 엎었다. 급하게 다가가는 현중을 외면한 채 내게 말했다.

'유월아, 나 잠시 화장실 갈껀데, 좀 부축해 줄래?'

 

난 분명히 그 때 '망설임'이란 것을 느꼈다.

단지 조명빛에 잠시 눈이 부셨을 뿐이라고 변명 하기에는,자존심이 더 상했다.
현중을 봤다.

그렇게 난 현중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몇초간을 정지했다.

 

이윽고 현중이 감정을 담지 않고, 한마디 했다.
'같이 가고 싶어?'

 

그말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부끄러움에 차마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 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 제법 오랜시간, 난 현중을 피해다녔다.
그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을 때조차 난 피했다.
적반하장인 것 같기도 했다.
내 자신에 대한 변명은 오직 수치 라는 것 뿐이였다. 아마 더 생각하기도 싫었던 거 같다.

어쩌면 그 시절, 난 내자신을 꽤나 사랑했었나 보다.

 

현중과 백치미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차마 묻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아무일 없었다는 듯 현중과 다시 다니게 되었을 때도 그일에 대해선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현중도 언급하지 않았다.

 

어느 밤 술자리에서 문득, 모든 걸 포용한 듯한 현중의 눈빛을 봤고, 난 한없이 작아졌었다.
그 시절, 난 현중에게 약자였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났지만, 앞으로도 난 현중에게 그때 이야기는 하지 않을 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