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 #3



호프집에는 시절을 풍미하는 가요가 경쾌하게 흘렀지만, 여자 둘과 함께 앉은 테이블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호기있게 선택한 자리였지만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구매팀녀는 자못 밝은 얼굴을 하고, 마케팅녀에게 붙임성있게 계속 말을 건넸다.
마케팅녀는 여전히 나에 대한 시선을 거부한 채, 구매팀녀의 말을 대충 받아넘기고 있었다.

 

'저도 언니처럼 업무영역이 확실해졌으면 좋겠어요.'
'...
입사한지 얼마 안돼서 많이 낯설겠다
.'
'
유월선배가 너무 잘해줘서요. 유월선배가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꺼에요
.'
'...'
'
정말 너무 친절하세요. 자금팀 관련 업무가 아닌데도 일일이 신경써 주시고, 은행에서도 곤란할 때마다 척척 해결해주신다니까요
'
'...'

 

미처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이미 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도 질끈 감았던 거 같다.
마케팅녀의 표정은 살피지 못했다. 아무튼 아무 대답이 없었다
.
당혹의 무게만큼 마케팅녀에 대한 내 마음의 무게를 가늠해 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도 이상해서 억지로 머리를 쳐들었다.
구매팀녀가, 신뢰가 듬뿍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구매팀녀에게 연정을 느낀 적 없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그리고 지금 무겁게 짓눌려진 심장으로 마케팅녀에 대한 내 입장을 새삼 확인했다.

 

심각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 어색할 것이다.
그러나 '구매팀녀에게 잘해준 것은 단지 후배였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픈 유혹을 느꼈다
.
그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추스려야 했다
.
구차하거나 불안한 태도를 보이면 좌절의 길은 가까워질 뿐이다.

 

'나도 미진씨랑 일하게 되서 좋지. 이대리랑 일하다가 이쁜 후배랑 하니 기분도 좋고 ㅎㅎ'
[
이쁜]이라는 단어를 특히 신경써서 읊었다.
만족스러운 능청이라 자평했다. 내 표정에 당혹의 흔적따윈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오래 앉아 있기엔 역시 곤란하다.

한자리 너머의 마케팅 팀장에게 업무관련 질문을 던졌다.
팀장이 관심을 가져줘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예전에도 그가 틈틈이 보여줬던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그 눈빛이다.
마케팅팀장은 오래전부터 나와 마케팅녀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에 마케팅녀와 가까워졌을 때도 관심의 눈빛을 보냈었고, 이후 냉냉해 졌을 때도 재밌다는 듯한 눈빛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지금 술자리에서도 마케팅녀와 나의 태도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는 듯 했다.

 

나와 이야기하는 도중, 그가 급작스럽게 마케팅녀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희영씨, 유월씨하고 싸웠어?'
마케팅팀장의 표정엔 심술기가 담겨있었다.

 

'아니요?'
마케팅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당혹감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녀에게 팀장은 어려운 상대였다. 아마 선참이 물었다면 화를 냈을지 모르겠다.

 

'혹시 유월씨한테 관심있는거 아냐?'
'
어머, 내가 왜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사람들의 시선에 그녀는 불안한 모습으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녀는 얼껼에 연단으로 끌려온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집중된 시선은 그녀의 코멘트를 강력히 요구하는 듯 했다.

 

그녀가 짧은 순간, 나를 봤다. 거의 넉달만에 받아보는 시선에 감개가 무량했다.
물론 표면적으론, 난 담담히 그 시선을 소화했을 것이다.

 

그녀가 이내 시선을 외면한채 태연한 듯, 그러나 부자연스럽게 물었다.

'그 때 그 아가씨랑은... 잘 되요?'

역시 넉달만에 받아보는 질문이다.

 

난 감회를 즐길 여유마저 버리고 지체 없이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 날, 희영씨 옆에서 내가 너무 행복해 보였다면서 떠나버리던데요?'
반응의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질문을 이었다. 의식적으로 전신의 힘을 쭉뺐다.

'맥주 한잔 더 주문할까요?'
그녀의 앞에 놓인 빈 맥주잔을 엄두해 두고 있던 터였다.

''

 

드디어 넉달만에 업무외적인 대화가 성립된 셈이다.

집중됐던 사람들의 시선은 흩어졌고, 얼껼에 대답해 버린 마케팅녀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했다.
목소리를 잔뜩 깔며 맥주를 주문해줬다.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역시 사과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그날 희영씨에게 큰 실례를 해서, 넉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미안합니다.'
'
제가 민감했나 봐요. ... 그럼, 그 때 그 아가씨는 정말 어떻게 된거에요?'

 

오랜 기다림의 결실에뛰는 가슴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아까 대답한 그대로 입니다. 그 말 듣고, 더이상 연락못하겠더라구요'
'...'


옆에 앉은 구매팀녀의 시선이 자꾸 신경쓰였다.
신경끄기로 했다. 또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다
.
 
마케팅팀장이 내친김에 한마디를 더 했다.

'희영씨, 잘 해줘, 저렇게 괜찮은 총각은 잘 안기다려줘.'
마케팅팀장은 푸근하게 웃었다.

 

지금 타이밍에선 내게도 부담스런 코멘트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도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거 같다.

서먹한 공기를 치우기 위해 난 마케팅녀에게 엄한 말을 해버렸다.

'그 케릭터 로열티 대금같은 외화지급스케즐은 늦어도 일주일전에 확정시켜줘야 합니다. 요즘 외환업무가 많이 빡빡해졌어요'
'
... 그럴께요'


소심한 인간은 업무의 권위에 의지하기도 한다.
그만큼 팀장의 한마디는 내게도 부담이였다.

 

오랜만에 말문을 튼 나는 부단히도 대화를 이어나갔고, 마케팅녀와의 서먹했던 공기는 차즘사라져갔다.
구매팀녀도 우리의 분위기를 파악한듯 침묵했다.

 

난 충분히 오래 기다렸고, 마케팅녀의 미소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평소 마케팅팀장에게 잘했던 것 같다.

 

역시 음덕을 쌓다보니 술값도 굳고...  운좋은 날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