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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 #4




새아침이 밝았다.
출근길, 희망에 부푼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케팅녀가 아침부터 찾아왔다.
진지한 얼굴이였다.

 

'유월씨,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이런거 기억하지요? 기획사 선정표. 제가 관리하던 서류를 잃어버려서요...

 전에 경리팀에 제출했던 전표에도 사본을 첨부했었거든요. 혹시 찾아주실수 있을까요?'

 

사실 난 그녀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틀 전에 경리팀 여직원에게 부탁했었지만, 차갑게 거절당했다.

경리팀 여직원은 마케팅녀에게 묘한 열등감이 있는 듯 했다.
대체로 사람들에게 쌀쌀한 편이였지만, 특히 마케팅녀에게 더했다.

 

물론 경리팀 여직원이 굳이 그걸 찾아줄 의무는 없다.
당시엔 차마 내게 부탁은 못하고 끙끙 앓았던 거 같다.

 

난 심술을 부렸다

'전 잘 기억이...'
'
정말요? 그 왜 한 반년전에... 오후에 사외행사한다고해서 다들 나가려는데,

 업체에서 보증금 반환해 달라고해서, 유월씨가 좀 번거로웠던 적 있었잖아요. 그때 그 전표...'

 

'글쎄요... 제가 단지 기억하는 것은, 그날 희영씨가 갈색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다는 거죠.’

 

말해놓고 보니 쑥쓰러운 느낌이 확 올랐다.
서둘러 일어나 자리를 뜨며 말했다
.
'오전 중에 찾아드릴께요.'

 

미처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못해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진 못했다. 아무튼 딱히 대답은 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경리팀 여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
많이 민망했다.

 

헤어밴드 이야기를 꺼낸건 잘한건지 모르겠다.
그동안 그녀는 날 무딘성격으로 판단했을 법하다
.
사실 난 결코 둔감하지 않다.

 

원하는 자료를 찾아서 그녀의 자리에 가보니, 부재중이였다.
책상에 올려놓고 나왔다.

 

잠시 후 그녀가 사내 메신저로 고마움을 표했다.
대충 별거 아니였다는 듯 대꾸했다가 밥한끼 사라고 했다
.
자판을 두드리는 손끝이 약간 긴장됐다.

 

[, 좋아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
단둘이 할 수 있다면 뭐든지!]

 

아까도 헤어밴드 운운해 놓고 민망했었는데, 또 탄력 받아버렸나보다.
나도 모르게 자꾸 오버했다
.
어쩌면 오래전 학생시절의 모습이 살아난건지도 모르겠다
.
그시절 자신감을 바탕으로 많이 느끼했었다.

 

하지만 그시절의 자신감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보다.
짧은 순간이지만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초조했다.

답변이 제법 지연됐다. 후회의 마음이 마구 밀려들었다.

결국 모니터에 별 수식어 없이 [오케이]란 글자가 떴다.

내 마음에 자신감을 담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일정을 맞추다 다음날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을 잡고나서 내 얼굴이 활짝 폈나보다.
오후에 경리팀 여직원이 몇번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봤었다.

 

다음날 그녀와 마주쳤을 때, 난 약간 감동했다.
그녀가 갈색 헤어밴드를 하고 나타났다.

사실 내가 그 헤어밴드를 기억했던 건 잘 어울려서가 아니라 특이해서다.
하루만 하고 다시는 착용하지 않았던 걸로 보아, 그녀의 센스도 괜찮았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하지만 그 마음이 생각할수록 이뻤다.
헤어밴드를 지적하는 나의 관심에 빨게지는 얼굴은 더욱 눈부셨다
.
자존심 강한 그녀이기에 의외였다.

 

외롭던 시절의 종식을 예감했다.
*
제법 비싼 레스토랑에 갔다
.
그녀는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했다
.
난 함박스테이크 싫어한다
.
목소리를 깔았다
.
'저도 같은 걸로'

 

예전 어느 시절처럼 난 과묵하게 무게를 잡고 있었다.
오래전 습관인가보다.

예전 어느 시절의 래파토리를 읊었다.
헤르만 헤세를 이야기했고, 레스토랑에 흐르던 모짜르트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녹슨 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났고, 대화는 매끄러웠다.
호응이 괜찮았다.

 

그녀가 문득 새로 산 지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기꺼이 택시타고 함께 명동에 갔다.

난 지갑이 그렇게 비싼 건지 몰랐다.

그 특이한 헤어밴드를 또 할까 걱정돼 큼직한 머리삔을 하나 골라줬다.
기뻐하는 표정을 보여줬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지는 모르겠다. 좀 저렴한 거였다.

 

황홀했던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문득 별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소비성향은 짐작대로 좀 과한 듯 했다
...
마음 한구석이 미미하게 불편했다.

 

그녀가 이뻐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