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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3 fin


 

근래들어 준표가 내게 자꾸 전화를 했다.
딱히 특별한 화제도 없이 의미없는 농담만 짧게 주고 받았지만, 목소리에선 특유의 활기가 없어진 듯 했다
.
미진에 대한 미련이 남는가 보다.

 

얼마전 준표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줘었다는 대학원 친구에게 전화해 봤다.

 
'너니까 얘기하지만, 여자얘가 무지 황당해하더라구, 뭐 그런 화상이 다 있냐고...'

 
역시나 녀석의 마초이즘을 받아 줄 만한 여자가 흔 할리가 없었다. 미진이가 그리울만 하겠다 싶다.

 

준표녀석이, 한창 연애로 바쁜 내게, 술 한잔 쏘겠다며 시간을 요구했다.
여자친구가 야근만 하지 않았어도, 난 거절했을거다.

 

회사 앞의 제법 깔끔한 퓨전 호프집에 갔다.
녀석이 메뉴를 주문하려는데, 미모의 여종업원이 상냥하게 메뉴 설명을 했다.

 

'여기, 개업기념으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내놓은...'
'
, 우리는 그냥 간단하게 이거랑
..'
'
일단 설명좀 들어주시겠습니까
?'
'..
'
'
여기 있는 세트로 주문하시면 XXX맥주를 4잔까지 무료로 함께 이용하실 수 있으며......'

 

결국 녀석은 상당히 고가인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녀석이 혼자말을 한다.

 

'아씨~ 그냥 오백짜리 호프에 골뱅이 먹고 싶었는데,'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아니 그럼 그거 왜 시켰어. 설명 잘 듣고, 싫다고 하면 되지. 하고 싶은 것도 얘기 못하냐?'
'
몰라. 얼껼에 그렇게 됐어'

 

준표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는 됐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거 같다.

 

미진이가, 녀석의 장점 중 하나라며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어디 갈지, 뭘 먹을지, 뭐 할지를 알아서 척척 결정해주는 모습이 의지가 됐다고
...
상대나 상황에 따라 사람은 달라지나 보다.

 

난 미진과의 근황을 물었다.
녀석은 별 대답이 없다
.
달리 할말도 없어 그냥 넘겨짚어봤다.

 

'헤어지고 나서 연락해 봤어?'
'
연락할 일 없을 거라고 얘기했었다니까'

 

녀석은 짐짓 목소리를 높였지만, 비참한 느낌이 얼굴에 역력했다.
연락한 것이 분명했다. 좌절당한 것도 확실하고.

 

자존심 꺽을 의사가 없어보이는 녀석을 살살 달래가며 인터뷰하기도 귀찮았다.
녀석은 기죽기 싫은지, 왕년에 잘나갔었다는 전설만 줄창 늘어놨다.

 

친구의 지리한 이야기를 대충 흘려듣다가, 여자친구의 퇴근을 알리는 호출을 핑계로,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별 성과 없이 끝난 술자리에, 녀석은 맥이 빠진듯 했다
.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심술이 있나 싶었다
.
인정하긴 싫지만, 어쩌면 소개팅 첫날의 불쾌함을 아직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일이다.

 

헤어질때, 녀석의 등짝을 한대 후리며 말했다.

 
'아까 호프집 종업원 눈치 보던 거 만큼 미진이한테 마음써 준적 있었냐? 뭘 좀 주면서 바래라.'

 

난 반응도 안보고 돌아섰다.
통쾌함 같은 걸 느낀건 아니다. 나 역시 크게 다를 거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자친구 희영을 만나 미진과 준표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브리핑해 줬다.
어디까지나 나의 속깊은 성품을 부각시키고자 함이였다.

 

희영은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인간말종' 운운하며 친구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친구는 상대도 말라는 말을 할때는 살짝 흥분한 거 같기도 했다.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어쩌면 준표의 모습은 그동안 억제하고 눌러서 들키지 않은 내 적나라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녀가 남자의 부족함에 관대하지 못한 여자는 아닐지 생각해봤다.
물론 당시 난 부족한 면이 없는 남자란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도 방금 희영이 보였던 그 혐오의 눈빛이,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날 내게로 향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예감이 황당했다.
이런 자신없는 느낌이 믿기지도 않았고, 곤혹스러웠다.

 

문득 희영이 한껏 밝은 표정을 만들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늘 내 표정을 잘 알아보는 그녀다그런 점이 꼭 좋지만은 않은거 같다.

 

이상하게 쓸쓸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
다음날도 희영은 야근을 했다
.
미진에게 메신저를 날려봤다. 그러고보니 내가 먼저 메세지를 보내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식사를 다하도록 그다지 대화가 없었다.
어제 느낀 쓸쓸함이 문득 또 머리를 어지럽혔다.

 

'여전히 남자다운 사람이 좋아?'
'
모르겠어요.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데, 좀 자상했으면 좋겠어요
.'
'
남자답다는 건 좀 애매한 말이야, 예전에 미국으로 어학연수 갔을때,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각각 이성의 덕목을 적어내라고 하더라구
.
 
여학생들이 남자의 덕목이라고 적어낸 말 중에 의외의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Brave] 그말 듣고 좀 웃겼어
.
 
근데 내가 웃으니까, 옆에 나이 많은 중국인 아저씨가 그러더라고, 용기있다는 말은 어리다는 의미라고
.'
'
재밌네요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 수습할 꺼리를 고민했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덕목이 용기라고 생각해. 용기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꺼야. 나이 먹을수록 오히려 용기가 필요한거 같아.'
 
아까 호출 온 거... 누구야
?'
'...'
'
이제 정이 뚝 떨어졌어
?'
'
모르겠어요
'
'
사람은 자신을 아끼는 만큼 남에게도 대우를 받는 거 같아. 그리고 그 친구 아직 경험미숙이긴 한데 못됐거나 모질지는 않잖아.

 자신있으면 한번 더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미진은 대답이 없었다.
'철없는 남자라도 어디까지 성숙해질지 알수가 없어. 남자가 성숙해지는 거 순간이야. 여전히 똑같다면 어쩔 수 없겠지...'

 

말해놓고 보니 어색했다.

미진한테라면 이런 말해도 될 만큼 든든한 이미지는 심어줬던 거 같기는 했다.
어쨌든 친구를 위해서 한말은 아닌 거 같았다. 미진을 위해서도 아니고...

결국 내 자신을 위해 한말 같았다.

 

그 주말에, 난 희영과 만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안내켰다.
그리고 내켜하지 않는 내 모습을, 순순히 수긍하는 희영의 태도도 영 못마땅했다
.
나도 나름 소심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난 다음주가 되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또 웃을 것이다.
더 신경쓸 것도 없다.

 

준표가 또 전화했다.

 
'
미진이 걔, 그냥 다시 만나려고... 얘가 좀 착하고.. 그정도면 뭐...'

 

그동안 자신이 한말이 있기에, 자존심 강한 녀석에겐 이런 통보절차가 필요한 듯했다.
[
내가 봐줬다느니, 참는다느니] 하는 말을 안하는 거 보면 나름 반성도 좀 한거 같다
.
기꺼이 둘의 화해를 격려했다
.
그러나 당시 난, 둘 사이가 오래갈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었다.

*
예상을 뒤엎고 그들의 연애는 롱런 했다.
실제로 그 둘은, 나와 희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사궜다.

몇년이 지난, 어느 가을, 녀석이 소주잔을 우수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헤르만 헤세를 운운했을 때, 난 어이를 상실했었다.

 

[사랑이란,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만큼 견딜 수 있는지, 희생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것]

 

녀석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진 않았다그러나 그 말을 한 순간만큼은 진지해 보였다.

 

아무튼 자기계발을 소홀히 하면 뒤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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