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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세상

문창극과 서울대 교수 수준

고대이집트인들은 그 시대의 역량을 동원해 피라미드를 지어냈고, 중국의 진나라는 만리장성을 지어냈다. 인류는 저마다의 가치를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여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가.


일단 이명박정권 5년동안은 4대강을 개발했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의 의지이자, 토건으로 경기를 부양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우리 시대의 뚜렷한 욕구를 반영한 셈이다.

달나라에 우주선 보내는 것 대신, 혹은 모든 대학의 등록금을 무료로 하거나 로봇 태권브이를 만드는 것 대신 우리는 강바닥을 팠다. 우리 시대의 선택이다.

 

헌데 수년동안 20조원 이상을 투입한 4대강 개발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우리 한국인들이 꾸준히 일관성있게 역량을 집중해온 분야가 있다. 이것은 4대강개발처럼 국가주도가 아닌 국민개개인이 자신의 의지로 역량을 쏟아 붓고 있는 분야다.

 

바로 사교육지출이다. 이미 연간 30조원을 초과한지 오래다. 4대강보다 훨씬 큰 규모다. 노후대책도 잊고, 여가생활도 묻고, 주구창장 쏟아 붓었고 앞으로도 그럴 듯 싶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다. 가히 민족적 역량의 집중이다. 그리고 그 역량 집중의 끝에 보이는 것은 서울대다. 내 자식 서울대 보내보겠다고 우리는 그렇게 피눈물로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들 영유아시절부터 영재교육 시킨다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사교육의 궁극인 서울대는, 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이 쌓아 올린 욕망의 상징인 셈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인이 쌓아 올린 지성의 상징이기도 할까…

 

 

 

그 서울대의 초빙교수 문창극이 시대의 상식을 위협했다. 민족의 역사가 폄하되고, 선조들이 흘린 피눈물이 모욕됐다. 헌데 서울대의 지성들은 억울하지가 않은 모양이다. 서울대 교수 수준이 그런게 아니라고, 그런 사람이 서울대에서 강의한 것에 대해 유감이라는 목소리가 그다지 들리질 않는다.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이 그토록 역량을 쏟아부으며 입학시키고 싶은, 최고의 지성 서울대가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다지 반론을 펼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교육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개의치 않고 있다. ‘그런 수준의 대학에 우리 아이를 보낼 수 없다’ 이런 명제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서울대에 자식을 보내려고 부단히 애쓰는 이유는, 그 곳에서 무언가를 배우게 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졸업장의 브랜드 밸류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브랜드 밸류는 서울대에 어떤 교수가 있건 중요하지 않다. 배움의 의미는 실종됐고, 졸업장이 중요한데 무슨 상관이랴..

 

서울대 교수들의 침묵을 탓할 일이 아니다. 국민의 수준이 그렇다. 그리고 나도 국민이니 결국 나 자신이 ‘쪽’팔리는 일이다.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