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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집 근처, 친구네 학교에 놀러 갔다.

 

친구가 학과방에 다녀와야 한다고 해서 따라 갔다.

방문을 열자 미모의 여학생이 있었다. 왠지 서둘러 친구녀석이 나를 끌고 나왔다.

사실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창틈의 석양을 은은히 받던 실루엣이 그림이 되어 의식에 박혔다.

 

캠퍼스 잔디 밭에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문득 아까 그 여학생의 신상을 이야기했다.

이름이 뭐고, 집이 어디고, 고등학교는 어디나왔고....

 

저녁이 되어 몇몇 친구들이 더 모여 술을 먹었다.

별 할 말도 없었다.

아까 그 여학생 생각이 났다.

"니네 과에 OOO이라는 애 말이야,"

친구가 화들짝 놀랜다. "어? 니가 어떻게 알아?"

 

나야 말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집이 어디고, 고등학교 어디 나오지 않았어?"

설마했는데, 그 녀석은 몇 시간 전에 지가 한말도 까먹었다. 

 

난 우수에 젖은 시선을 먼 곳으로 날리며 읖조렸다.

 

'고교시절부터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용기를 내지 못했어,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왜 자꾸 이 학교에 와서 서성이겠냐'

사실 난 순발력은 있다.

 

녀셕은 감동했다. 자신이 꼭 만남을 주선하마 다짐을 했다.

 

그 날이후 몇번의 통화를 통해서, 그 녀석이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졌고, 당연히 만남 주선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곤 가을이 되었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시간은 너무 지루했다.

 

전철안에서 별 잡다한 상상을 하다 문득 그 여학생이 생각났다. 얼핏 스친 실루엣만이 희미하건만...

 

'미지'란 매력의 다른 말이다.

 

역시 통학 시간이 너무 긴 것은 문제였다. 난 문득 편지를 한번 써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처음 생각 했을 때만 해도 소극적 상상이였다. 근데 역시 통학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한달 동안 편지 내용을 다듬어 버리고 말았다.

미지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나름 흥분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한달'의 작품이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유월 입니다.  지켜본 바로는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x월 x일 토요일 인천 대한서림 앞 5시.

 

제안은 간결해야 한다. 그러나 절제는 힘든 일이다. 한달의 시간은 삭제와 생략의 시간이였다.

그러나 진심(반성한다)의 전달을 생략할 순 없다.

 

한달 동안 편지만 다듬은 것은 아니다. 대학 학보에 싸서 보내게 되면 녀석의 견제가 우려되니 겉봉에 적는 주소의 글씨는 동아리 여학우에게 부탁하는 치밀함까지 준비했다. 

 

그 날은 바람을 맞더라도 나름 순수의 기분을 만끽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보냈다는 그 자체가 흐믓했다.

 

약속 전날, 녀석이 전화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아직 준비가 안됐으니 다음에 만나잖다.

기분이 확 꿀꿀했다.

다른 친구 녀석을 불러내 당구나 쳤다. 패해서, 게임비도 왕창 물렸다. 기분이 더 꿀꿀했다. 

녀석의 개입으로 순수와 낭만의 연출에 실패했다.

차라리 무작정 바람 맞고 싶었다.

 

몇일 후 그 학교의 학보가 내게 발송되었다.

 

첫문장은 내가 보낸 편지와 동일 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OOO입니다...

그러나 상당한 장문이였다. 섬세한 문체로, 동성과는 다른 이성과의 교제에 대한 조심스러운 우려와 의미 등을 설파했다.

읽는 내내, 펜팔도 나름 괜찮겠다는 생각과, 또 다시 준비 할 답장을 생각했다.

 

끝에서 두번째 문장 -저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야 애교다 ㅎㅎ.  당당히 답장해야 겠다.

 

근데 마지막 한 문장을 보고 갑자기 답장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 때는 그 이유를 희미하게 이해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 모르겠다. 왜 답장하기 싫어졌을까

 

 

라스트 문장

-정말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