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홍조


여학생이 별로 없는 경영학과.. 

새학기의 강의실에는 낯선 여학우들이 다수 보였다.
확인해 본 바, 편입생들이였다.
분냄새를 맡으며 강의를 듣는 기분이 신선했다.

 

몇 일의 관찰 끝에, 미모가 돋보이는 여학우의 옆에 앉았다.
낡은 방법이지만, 그녀의 발밑으로 볼펜을 떨어트렸다.


조준은 정확했다.


ㅇㅇ여대를 다니다 왔다고 한다. 동갑으로 나보다 생일이 하루 느렸다.
이지적이고 인상이 차가웠고 다소 어두운 느낌을 줬으나 가끔 보이는 웃음이 고왔다.

자연스레 강의실에서 함께 앉기 시작했고 식사도 같이했다.


며칠 후 집이 같은 방향인 친구와 셋이서 함께 식사를 했다.
식당에 자리를 잡은 후, 친구의 첫마디가 가관이였다.
 

"얘가 볼펜 떨어트렸지?"
 

둘이 있을 땐 조용했지만, 막상 친구가 편한 농담을 늘어 놓으니 말이 많아졌다.
 

"얘한테 자꾸 수업시간에 친한척 좀 하지 말라고 해, 까르르"

 

좀 의외였다. 다른 모습이다.

그 후 겹치는 수업시간에 같이 수업을 들었고, 가끔 저녁도 같이 먹었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확연해 지는 것은 둘이 있을 때는 조용하다가, 여럿이 모이면 쿨한 친구인양 괄괄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으나, 당시에는 가리는 것이 많았던 거 같다.


나의 이상에 부합되지 않는 그녀에게 매력을 잃었다.
그 후 그냥 친구처럼 대했다.

강의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신이 일전에 사준 함박스테이크를 사달라고 농담처럼 얘기했고 난 농담처럼 흘렸다.
그러다 시험때가 되면 난 갑자기 그녀에게 친절해 졌고, 이내 필기 노트를 빌렸다.
 *
아침에 전철에서 고교동창생을 만났다.

어제가 내 생일이였다고 하자 여름방학 때 일본을 다녀왔다며, 열쇠고리 하나를 줬다.


전철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그녀를 발견하곤, 당당하게 옆에 가 앉았다. 
그녀는 차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 없었다.

 

'벌써 네 생일이구나 시간 참 빠르다. 만나면 주려 했는데..' 아까 받은 열쇠고리를 건넸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성에 관심 있어서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기 때문에 잘해주는 것일도 모르겠다.

점심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실 나 함박스테이크 싫어한다.

기말고사 때도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를 빌릴 수 있었다.

3월, 새학기가 되었다.
의외였다. 수강신청할 때 같이 있었기는 했지만, 그녀의 강의시간표는 나와 거의 일치했다. 우연이기는 힘들다.

강의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여전히 함박스테이크를 얻어 먹어야 겠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웃고 말았다.

 

캠퍼스 뒤쪽 숲에서 마주쳤다. 도도하던 그녀의 모습이 왠지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같이 앉아서 얘기 하자고 했다.
 

호기롭게 함박스테이크 사달라고 할때의 모습이 아니였다.
그녀가 갑자기 자연스러운 양 목소리를 높였다.
 

'나 함박스테이크 안 사줘도 돼, 대신 함박스테이크 만한 사탕 사줘."
 

사탕이라는 단어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그동안 보아온 모습 중에서 가장 이뻤다.

난 그 시절 순수했다. 순수함은 완고함이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

3월 15일 (하이트데이 다음날 이었다.)
공인회계사 1차 시험이 코 앞이였다. 고시공부하는 녀석한테 줄 엿을 사러 제과점에 갔다.
이미 품절이였다. 한켠엔 제철을 놓친 사탕들이 애물단지처럼 쌓여 있었다.

엿 대신 사탕이다.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도 없었다.

손에 꽉 차는 두툼한 놈 하나를 천원에 샀다.

 

도서관에 가니 친구는 안보였다.

경영대학 건물 로비 앞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 청바지에 눌려 불편한 사탕을 주머니에서 막 꺼내는 참이였다.
그녀의 시선이 내 손에 닿았다.
 

"함박스테이크 만한 거 정말 구하기 힘들었어, 몇일 씩 주머니에 넣고 다녔더니, 포장도 다 뜯어졌네...."
  

입이 또 사고를 쳤다.

왜 책임 못질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단지 자연스럽게 맞아 떨이진 순간의 멋진 연출에 순응했던 것 같다.
어쩌면 만인의 연인이 된다는 것, 그 유혹이 강렬했을지도 모르겠다.

딱! 함박스테이크 만했다.

그녀가 또 저녁을 샀다. 식사 내내 별 말이 없었다.

 

감정은 의지의 영역이 아니다. 통제 너머에 있다. 마음이 돌려지지는 않았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침묵을 지켰다.
이런 침묵과 어색함이 오히려, 사탕에 마음이 담겼다는 인상을 줄 법하다.

 

노래방을 갔다. 그녀가 오해할 만한 노래를 피해 선곡했다.

근데 그런 작위는 역설적 오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

그녀는 딱 한곡만 불렀다.

박상민의 '하나의 사랑'

 

당시 첨 들어 봤는데 나름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가 부르는 것을 듣고 있자니 가사가 참 쓸쓸했다.

간주 중에 그녀가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그 무게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내 마음에 그어 놓은 선은 이미 맹목이였다.
 

한강까지 걸었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건너편 빌딩 빛은 한강을 비쳤고 또 그녀의 긴 머리결에 흘렀다. 운치 있었다.
서로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나도 문득 감상에 젖었드랬다.
 

같이 버스를 탔다. 나는 곧 내려서 인천행 전철을 탈 것이고 그녀는 계속 가야 할 것이다.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띄며, 농담처럼 말했다. "나 집에 데려다 줘라'
난 농담 대하듯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정색을 하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나 집에 데려다 줘'
짧은 순간 깊은 고민을 했다.

결국 그녀를 위한 최대의 배려를 하기로 결심했다.

 

"미안해 나 갈께"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최고의 배려는 내 의사를 분명히 하는 것이리라.

전철을 타고 오며, 노트 필기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

그녀는 여전히 나를 마주 치면, 농담하듯 웃었고, 나는 가끔 뻔뻔하게 옆 좌석에 가 앉아 수업을 들었다.
시험을 앞두고는 당당히 노트를 빌려 봤다..

많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여전히 괄괄했고, 혹 둘이 있을 땐 좀 어색했다.
그러다 그녀를 일방적으로 쫓아 다니는 나이 많은 선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선배앞에서 나를 의식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 복학생은 진지했고, 당연히 그가 설 자리였다. 난 기꺼이 물러났다.
 
노트 필기도 습관이 되면 할 만 한 것을...
 
언젠가, 대학 축제 공연장에서 마주쳤을때, 그 복학생의 질투어린 열변을, 여전히 나를 의식하며 외면하는 모습은 왕자의 마지막 착각이였을 것이다.


남자는 가끔 훈장처럼 쉽게 이야기한다. 난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었고, 이별은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됐으며, 미안하다고...
그리곤 여전히 멀쩡한 그녀를 발견하곤 충격을 먹는다.
위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