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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의 향기 #1

휴학을 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주립대학 부설 랭귀지 스쿨이였다.

 

학급 배정을 위해 영어테스트를 받았다.
회화는 바닥이였고, 문법은 상위였다.

 

다음날 공지를 보니 중급반으로 배정됐다
넓은 홀에서, 배정된 학급별로 소집이 있었다.

 

큰 원탁에 앉아 있는데, 화려한 옷차림에 유난히 눈이 큰 동양미인이 내 옆에 와 앉았다.
차가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이름은 스미나라며 먼저 인사를 해왔다. 지극히 자연스런 태도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마도 이국적이어서 차갑다고 느꼈나보다.
목소리는 외모와 달리 걸걸했다.

   

우리는 둘 다 영어 듣기가 서툴렀다.
알아듣기 힘든 입학 및 학급운영 관련 안내 설명을 들으며, 함께 안내책자 내용을 살피기도 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근사한 이국의 여인과 의외의 대화를 이어 가며, 알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자연스레 같이 교정을 거닐게 되었다.

 

낯선 땅에서 이국의 낯선 미인과 낯선 캠퍼스를 걷자니 긴장됐다.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는 건지 확신도 없었고, 간혹 사전을 동원하기도 했다.
 

집은 도쿄이고, 상당히 유복한 집안인 듯 했다.
나중에 가족사진을 봤는데, 집에 운전기사도 있었다.
간호학을 전공했고, 뇌수술하는 것도 목격했다고 한것 같다.
스포츠의학에 관심이 많고 스포츠를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나이 얘기가 나왔다.
나보다 한살 많았다.
 

왠지 어리다고 하기 싫었다.
서로 발음도 잘 안통하는 마당에 대충 내가 한살 더 많은 거처럼 대답해 버렸다.
스미나가 굳이 재차 확인을 했다. 난 그녀보다 한살 많은 셈이 되었다

 

마침 캠퍼스에서는 인디언을 기리는 축제가 한창이였다.

농구 골대 앞에서 사람들의 긴 줄이 있었다.
자유투 이벤트였다.
2개를 던져 모두 성공하면 상품이 주어진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참여를 권했다.
먼저 던진 그녀의 공 두개는 모두 아슬하게 림을 빗겨갔다.
당당하고 활동적인 모습이 매력적이였다.

 

내게 공을 내밀었다.
난 체격은 좋았지만, 운동 못한다. 몸치다.

그러나 정신이 육체를 극복하리라는 신념이 넘치던 때였다.
고교시절 체육시간에 배운 자유투의 기본 자세를 떠올렸다.
말그대로 혼신의 집중력을 다해 던졌다.

 

깨끗한 골인이였다. 생애 최초가 아닌가 싶다.
그녀는 '역시' 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환호했다.

 

그 빛나는 환호에 긴장이 풀렸나 보다.
두번째 골은 어이 없이 짧게 떨어졌다.
내 본 실력이다..

 

내 기숙사 이전 신청을 위해 함께 대학사무실에 가자고 제안했다.
외국인들은 내 발음 보단 그녀의 발음을 더 잘 알아듣는 듯 했다.
 

당시 이미 난 내 발음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올림픽'이란 말을 해도 못 알아 들을땐 죽을 맛이였다.

 

그녀가 대신 설명을 해줘서 대충 접수를 시킨것 같다.
사무실을 나오며, 이제 헤어지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스타디움에 가보자고 했다.
기쁜 표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말도 잘 안통해서 별말은 안했다.
그래서 긴장과 흥분이 더 배가됐던 거 같기도 하다.

 

짧은 듯 꿈결같은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 설레이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책상에 앉아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왜 능청 맞게 당당히 옆에 못 앉았는지 너무 후회스럽다.
수줍었나 보다. 어쩌면 이국적 자태에 위압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문화에서 살다 온 그녀는 내 행동을 오해 할 법도 할 것이다.
어쩌면 신경도 안쓸지 모를 일이다.

 

한국인 형이 옆에 앉아서는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이 형이 수업 후 밥도 사주고, 당구대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설마 앞으로도 이 형이랑 같이 앉아야 하는 것인가...

 

기숙사도 가깝고, 옆 반이였던 한국인 누나, 리나하고 부담없이 가끔 어울렸다.

심심한 저녁, 리나와 캠퍼스 산책을 했다.
벤치에 앉으니 밝은 조명을 한껏 받고 있는 깔금한 테니스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백인 남자와 동양인 여자가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여자의 실력이 제법이였다.
묶은 머리를 마구 휘날리며 활기차게 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리나가 말했다.

'쟤, 스미나 아니야?'

 

스미나 맞았다.
훤칠하고 건장한 저 남자 역시 왜이리 멋있게 보이는지 나 자신만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리나가 염장을 긁는다.
'와~ 진짜 잘 어울리지 않냐, 만면에 웃음을 띄고 치는 저 모습이 바로 행복의 절정 아니겠어?'

타는 듯한 한숨을 내쉈다.

 

그날 이후 리나가 자꾸 나를 부추겼다.

'한번 전화해봐,  시도는 해봐야지. 너 정도면 충분히 통한다니까.'

 

은근히 약올리는 듯한 태도에 발끈 한거 같기도 하다.
'나 정말 우리 학교에서 잘 나갔거든? 좋아, 내가 로맨스의 정석을 보여줄께!!'

 

늦은 오후, 리나방에서 전화했다.

스미나가 받았다.

대충 나를 알아 본거 같기는 했다.
뭇 여자 앞에서 현란한 달변을 구사하던 나다.

 

'아 워너 미튜'

'sorry?'

 

'아이 원튜 밋 츄"

"sorry, I can't understand you."

 

"아~이, 원트, 투, 미트, 유!"

'oh!'

 

'Are you free this evening?'

'No, sorry.'

 

리나는 호홉곤란을 일으키며 웃고 있었다.

나도 숨막혔다.

 

나 원래 달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