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9 11:15


신입사원시절

개발팀의 팀웍은 사내 최강이였다.

그들은 항상 함께 움직였다.
식사도 우르르 같이하고 술자리도 자주 하고, 소소한 경조사까지도 서로 잘 챙기는 듯했다.
업무시간에도 일을 하는 게 맞는 가 싶을 정도로 실험실에서 웃음소리가 가시지 않았다.
그들의 분위기를 보노라면 대학시절의 동아리 모임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중심에 김대리가 있다.

팀원들은 그를 무척이나 따랐다.
김대리외 4명는 독수리 5남매마냥 활기차고 화기애애한 직장생활을 구가했고 난 그들이 부러웠다.

 

여직원 두명은 각각 김대리에 의해 '엽기녀'와 '이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남직원 두명 중 하나는 우직하고 무난한 신입사원으로 내 동기였으며
다른 한명은 약간 까칠하고 삐딱한 느낌이지만 김대리를 중심으로 훌륭한 궁합을 이루고 있었다.

 

중년의 개발팀장은 왕따였다.
말하는 거 좋아하고 어울리는 거 좋아하는 팀장이였지만, 결국 현실을 수용한듯 보였다.

 

리더쉽있고 생각 깊은 김대리는 사람보는 안목도 높은 게 분명하다.
내게 호감을 보였다.
그들의 술자리에 종종 나를 불렀다.

 

'이쁜이'는 워낙 내성적이였고, '삐딱남'은 내가 거북했다.
그래서 그들의 술자리에 끼게 되면, 보통 입사동기나 엽기녀와 주로 대작 했다.

 

엽기녀는 발랄하고 깜찍한 이미지에 누구에게나 넉살이 좋았는데, 나하고도 허물없이 지냈다.

엽기녀와 편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문득 문득 이쁜이에게 눈길이 갔다.
언제나 엷은 미소를 띄고 조용히 앉아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는 모습이 이뻤다.

 

그들의 회식자리는 경리팀에 비할 바없이 조촐했지만, 넉넉하고 단란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어쩌면 '이쁜이'에게 관심이 생겨서인지도 모르겠다.

 

슬쩍 동기를 인터뷰한 결과, 이쁜이는 딱히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분명치 않지만, 김대리는 엽기녀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는 의견도 접수했다.
 

실험실에서 늘 엽기녀와 김대리는 알콩달콩 농담을 주고 받으며 티격태격한다는 것이다.
동기가 '골때리는' 경우라며 해준 이야기는,
김대리가 간혹 퇴근시간 무렵에 이쁜이를 불러다가 인터넷 성인싸이트를 보며 같이 깔깔거린다는 것이다.

점잖은 이미지와 안어울리는 행동이 상당히 의외였지만, 김대리의 이쁜이에 대한 인식은 안심이 될 만하다고 판단됐다.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엽기녀한테도 그랬다간 낭패를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엽기녀와 이쁜이는 간혹 개발중인 시제품을 잔뜩 가지고 와서 시음 테스트를 요청 했다.
특히 엽기녀가 각각의 맛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하라고 다그치곤 했는데, 그 투정이 밉지 않았다.
한가지 제품을 먹으면 물컵을 들이대며 어서 입 헹구고 다음 것을 먹으라고 재촉하곤 했다.

반면 이쁜이가 물컵을 내밀때도 있었는데, 목적이야 같았겠지만, 느낌이 달랐다.
엽기녀는 편한 친구에게 애교있게 닥달하는 느낌이라면, 이쁜이는 갈증해소를 배려해주는 손길같았다.

 

이쁜이에 대한 호감이 점점 늘어갔다.

이젠 점심시간에 개발실 앞 휴게실에서 그네들의 한가한 대화에도 끼어들고자 했다.
이쁜이에게 관심을 표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엽기녀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렇다고 엽기녀가 내게 연정을 갖고 있다고 보진 않았다.
단지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 좀더 어울렸을 뿐, 이성으로 받아들이진 않으려 했다. 그녀에겐 김대리가 있음도 충분히 주지하고 있던 바다.

그러나 늘 엽기녀하고만 실컷 이야기하게 되곤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거나 미처 전화를 받지 못하면 경리팀 여직원이 대신 받는다.
특히 퇴근무렵에는 업무상 시재를 맞춰야 해서, 으레 여직원이 받곤 했다.
 

실험실은 1층이였고, 경리팀은 4층이였다.
엽기녀가 퇴근무렵에 내게 전화를 자주 하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있거나, 같은 방향이니 퇴근길에 동행하자는 이유다.

경리팀 여직원은 엽기녀에게 늘 쌀쌀했다.
그 쌀쌀함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 꿋꿋하게 전화도 계속했고 달리 불평도 없다.
그런 거 보면 소탈하면서도 당돌한 느낌이다.


이쁜이한테 대쉬해야 하는데 자꾸 엽기녀하고만 엮였다.

엽기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늘 편하게 대하는 엽기녀에게도 여하튼 호감은 있었다. 그러나 자꾸 이쁜이가 생각나는 것을 어쩌랴...
더구나 엽기녀는 김대리와....
심지어 김대리와의 줄다리기에 나를 활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해봤다.


퇴근길 엽기녀에게 물었다.

'김대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좋은 선배지..'
'그게 다야?'
'왜? 질투 느껴?'

 

'내가 왜!'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언성을 높였다. 장난이라는 인상도 주지 못한 거 같다.

이쁜이를 너무 의식한 탓인지, 순간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나 보다.
능청 맞던 내가, 이리 진지하게 흥분할 줄 몰랐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수습해 볼까도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냉정해지기로 했다.

'같은 남자지만 김대리는 참 괜찮은 남자야,  연애상대로서도...'
차갑게 말했다. 분명하게 선을 그은 셈이다.
필요할 땐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엽기녀는 퇴근길에 동행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제 작업을 위한 큰 산 하나를 넘었다.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러고보니 삐딱남도 이쁜이에게 관심이 있는 듯 했다.
이쁜이에게 말 좀 붙여보려면 계속 내게 엉뚱한 화제를 쏘아붙였다.
또한 이쁜이한테 접근하기엔 엽기녀의 시선이 여전히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운신의 폭은 좁기만 했다.

작업의 로드맵을 구성하고 적극적인 액션을 취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어느밤
술자리가 파하고 술집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 간 엽기녀와 김대리를 기다리며 술집 앞에 섰다.
이쁜이가 홀로 멀찌기 떨어져 서 있었다.
얼큰하게 오른 취기에 용기가 생겼나 보다. 접근해 갔다.

 

'밤이 늦었는데, 혼자 갈 수 있겠어?'

 

반응이 별로였다.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내 시선을 외면하고 마침 나오는 김대리 옆으로 갔다.
분명 벽이였다.

 

김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담담한 표정이였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이채를 느꼈다.

 

그날 밤 꿈에서도 김대리의 눈빛과 이쁜이의 뒷모습을 봤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계속 신경 쓰였다. 결코 부정적인 눈빛은 아니였다.

 


사내 인트라넷 게시판에 청천 벽력과도 같은 뉴스가 떳다.
김대리와 이쁜이의 결혼발표였다.

모두가 경악했다.

늘 가까이서 함께 하던 개발팀의 충격이 가장 컸다.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내 동기와 삐딱남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며 엽기녀의 눈치를 살폈다. 나도 엽기녀가 조심스러워 졌다.

전문가들로 급조된 진상 조사단의 발표에 따르면
김대리와 이쁜이는 술자리가 파하면 제3의 장소에서 재회하여 항상 김대리가 이쁜이의 집까지 바래다 줬다고 한다.
회사에서 그들의 교제를 짐작할 수 있는 행동은 결코 없었다며 그들의 탁월한 연출에 경의가 표해졌다 .
예비부부의 절묘했던 비밀연애담이 전설과도 같이 여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난 듣고 싶지 않았다.

 

엽기녀의 상처가 가장 컸다.
나도 일조했지만, 주변에서 은근히 김대리와의 교제를 가정했던지라, 모두가 그녀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하고자 했으나 주변의 시선에 신경질이 날만했다.
항상 발랄하고 말많던 엽기녀의 침묵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졌다.
삐딱남도 닭 좋던 개를 연상시키는 듯 허탈해 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는 듯, 오히려 내게 조소를 보냈다.

 

개발팀의 팀웍은 와해되었다.

김대리는 더이상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었다.
구내식당에서 단둘이 마주하고 식사하는 예비부부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회식도 사라졌고, 업무시간의 씨끌법적 하던 분위기도 변했다.

타부서 사람들도 편하게 드나들던 개발실 앞 휴게소는 쓸쓸히 방치되었다.

 

엽기녀에게 유감을 표하고 위로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내키지 않았다.

눈빛때문이다.


한동안 술만 먹으면 김대리의 그 눈빛이 떠올라 한 잔씩 더 들이키곤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 거북스럽고 불쾌하기까지 했던 눈빛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눈빛에 담겨져 있던 마음은 '동정'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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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