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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바람처럼 마구 스치던 날 #3

마케팅팀장은 상당히 다급하다고 했는데, 은행을 향하는 마케팅녀의 발걸음은 한가롭기까지 했다.
처음엔 다소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내 그녀가 작심한 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저기 화단에 있는 꽃들, 참 앙증맞지 않아요
?'
'
어떻게 저런 그림들을 벽에 그려놓을 생각들을 했는지 참 어이가 없어요
'
'
이번에 신제품 판촉행사가 있는데, 아는 후배 중에 아르바이트할만한 분 없나요
?'
 
늘 고고하기만 했던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신선했다
.
이제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은행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업사원을 만나, 그가 요구하는 액면가 대로 수표 몇장을 발행해 주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도 천천히 걸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지하철녀와 그녀를 저울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오늘따라 말이 많은 마케팅녀에게 소극적인 응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내 자신의 복잡한 심경때문인 것 같다
.
그래서 마케팅녀에게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인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나를 의식했는지 그녀가 문득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요
?'
난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없어요.'
말 튼지 이틀째인 지하철녀와 사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
떳떳했다.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까지 복귀하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얼핏 환청처럼 마케팅녀의 콧노래 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했다
.
*
지하철녀는 나보다 두살이 어렸다
.
무슨 머천다이징이라는 일을 한다는데, 구체적으로 무슨일인지는 모르겠다
.
대화를 튼 이튿날 퇴근길부턴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
늘 느끼는 거지만, '오빠'라는 말엔 남자를 약하게 하는 마법이 담겨있는 것 같다.

 

아마 오빠라는 말때문이였나 보다.
호기있게 집근처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에 갔다.

 

그녀는 세자매 중 막내라고 했다.
조용한 듯 싶다가도 당돌한 면이 있었다
.
'
회사다니다 보면 추파던지는 여자 없어요
?'
'
글쎄 뭐
...'
대충 흘렸지만, 마케팅녀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마케팅녀 정도의 미인과 인연이 닿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아직 진행된 것도 없다.

늘 실속없고, 썰렁했던 내 청춘이였는데, 갑자기 어려운 결단이 필요해 질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원래 세상이 가혹하다.

 

당시 자금 담당이다보니. 당일의 시재 맞추는 업무를 끝으로 거의 퇴근시간이 일정했다.
지하철녀는 퇴근시간이 일정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남영역에서 가까웠다.
월요일날 말문을 튼 후 두 번정도 남영역에서 만나 같이 내려왔다
.
그녀의 회사가 종각에 있어, 내가 기다려야 했다.

 

주말에는 만나지 않았다. 약속이 있다고 둘러댔다.
왠지 속도조절을 하고 싶었다.

마케팅녀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집에 가 편안히 누워 있으면 마케팅녀가 자꾸 떠올랐다.
역시 미모에 끌리나 보다. 어쩌면 아직 진행된 것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미인이다 보니 뭇남자들에게 방어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
또 보기와 달리 여성적이다
.
며칠전 그 수줍었던 모습은 내 기억에 분명히 각인돼 있었다.

 

그러나 소위 '얼굴값'한다는 마케팅녀와 사귄다는 것이, 결혼 적령기가 다가오는 내 입장에선 고민해볼만한 일이긴했다.
지하철녀의 밝은 심성은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외모가 그렇게 빠지는 것도 아니다
.
자신의 본심을 파악하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이다
.
난 어느새 두사람을 비교하고 있었다.

김칫국 마시는 기분이 쏠쏠했다.

 

아침에는 지하철녀와 나란히 대화를 하면서 왔다
어느새, 내 출근 모습이 변했다
.
인천지하철에서의 단잠을 버렸지만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
아침에 일어날 때도 늘 피곤때문에, 몸이 무거웠는데 한결 여유가 생긴 기분이다
.
절대 지하철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출근을 거듭할 수록 지하철녀의 말이 늘어났다
.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다
.
주로 주변의 신변잡기이야기를 많이 했다
.
또 지인들의 연애이야기도 몇번 들려줬는데, 남자의 성실함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늬앙스를 줬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마케팅녀가 자꾸 의식되는 거 같았다
.
*
마케팅녀가 내 자리로 와서 문서작성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
생뚱맞긴 하다. 마케팅팀에 고수가 훨씬 많다.

 

난 기꺼운 마음으로 설명해줬다.
과하다싶을 정도로 내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하는 마케팅녀의 모션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
화장품 냄새에 긴장했다
.
지하철녀의 옅은 향수냄새와 대비되었다.

 

난 설명하다말고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서로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녀는 수줍음 속에서도 무심한 듯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내 시선을 기어이 받아냈다
.
나도 이내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지만, 뛰는 가슴을 그녀에게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휴게실 근처를 지나는데 마케팅녀와 그녀의 단짝인 기획팀 여직원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아까 고마웠다며 음료수 한잔 사주겠다고 한다
.
기획팀 여직원이 평소와 달리 유난히 말이 많았다
.
기획팀녀의 묘한 미소를 보며, 이미 마케팅녀는 자신의 단짝에게 나와의 근황을 이야기한 듯 싶었다.

 

늘 칼퇴근하는 나와 달리 마케팅녀은 야근이 제법 있었다.
기획팀녀가 짐짓 정색을 하고 마케팅녀에게 물었다
.
'
오늘도 야근이야
?'
'
아니 오늘은 칼같이 나갈래'

  

난 심술쟁이가 아니다. 바로 반응을 보였다.
'
뭐 좋은 계획 있어요
?'
'
아뇨... 딱히 할일은 없어요
....'
그 어색한 표정에 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
'
집이 어느 방향이에요
?'
'
당산동이요
...'
'
어딘지 모르겠네요 ㅎㅎ 전 일호선만 타고 다녀서
'
'
저도 일호선 타요
'
그녀가 버스 타고 통근하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
모르는척 반갑게 놀라워 해줬다.

 

여느때처럼 6시쯤 마케팅녀의 동향을 보며 퇴근했다.
딱히 사전에 약속한 것도 아닌데, 기획팀녀와 마케팅녀 그리고 나는 나란히 걸어 나왔다
.
난 자연스럽게 타이밍을 맞췄고, 그녀도 교감한 듯 보였다.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교차로에서 기획팀녀가 일이 있다며, 다른 길로 향했다.
내게 격려의 눈빛을 보내는 듯 했다
.
무슨일이냐며 묻는 마케팅녀의 표정이 영 어설펐다
.
그래서 더 이뻐보였다.

 

가을의 석양은 어느새 옅은 주홍빛을 드러냈고,, 기분은 날아가는 듯 했다.

 

역앞에 지하철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코 앞에서 동글해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언제나 내 청춘은 혹독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