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팀장은 상당히 다급하다고 했는데, 은행을 향하는 마케팅녀의 발걸음은 한가롭기까지 했다.
처음엔 다소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내 그녀가 작심한 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기 화단에 있는 꽃들, 참 앙증맞지 않아요?'
'어떻게 저런 그림들을 벽에 그려놓을 생각들을 했는지 참 어이가 없어요'
'이번에 신제품 판촉행사가 있는데, 아는 후배 중에 아르바이트할만한 분 없나요?'
늘 고고하기만 했던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신선했다.
이제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은행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업사원을 만나, 그가 요구하는 액면가 대로 수표 몇장을 발행해 주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도 천천히 걸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지하철녀와 그녀를 저울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마케팅녀에게 소극적인 응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내 자신의 복잡한 심경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마케팅녀에게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인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나를 의식했는지 그녀가 문득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요?'
난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없어요.'
말 튼지 이틀째인 지하철녀와 사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떳떳했다.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까지 복귀하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얼핏 환청처럼 마케팅녀의 콧노래 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했다.
*
지하철녀는 나보다 두살이 어렸다.
무슨 머천다이징이라는 일을 한다는데, 구체적으로 무슨일인지는 모르겠다.
대화를 튼 이튿날 퇴근길부턴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늘 느끼는 거지만, '오빠'라는 말엔 남자를 약하게 하는 마법이 담겨있는 것 같다.
아마 오빠라는 말때문이였나 보다.
호기있게 집근처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에 갔다.
그녀는 세자매 중 막내라고 했다.
조용한 듯 싶다가도 당돌한 면이 있었다.
'회사다니다 보면 추파던지는 여자 없어요?'
'글쎄 뭐...'
대충 흘렸지만, 마케팅녀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마케팅녀 정도의 미인과 인연이 닿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아직 진행된 것도 없다.
늘 실속없고, 썰렁했던 내 청춘이였는데, 갑자기 어려운 결단이 필요해 질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원래 세상이 가혹하다.
당시 자금 담당이다보니. 당일의 시재 맞추는 업무를 끝으로 거의 퇴근시간이 일정했다.
지하철녀는 퇴근시간이 일정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남영역에서 가까웠다.
월요일날 말문을 튼 후 두 번정도 남영역에서 만나 같이 내려왔다.
그녀의 회사가 종각에 있어, 내가 기다려야 했다.
주말에는 만나지 않았다. 약속이 있다고 둘러댔다.
왠지 속도조절을 하고 싶었다.
마케팅녀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집에 가 편안히 누워 있으면 마케팅녀가 자꾸 떠올랐다.
역시 미모에 끌리나 보다. 어쩌면 아직 진행된 것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미인이다 보니 뭇남자들에게 방어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또 보기와 달리 여성적이다.
며칠전 그 수줍었던 모습은 내 기억에 분명히 각인돼 있었다.
그러나 소위 '얼굴값'한다는 마케팅녀와 사귄다는 것이, 결혼 적령기가 다가오는 내 입장에선 고민해볼만한 일이긴했다.
지하철녀의 밝은 심성은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외모가 그렇게 빠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본심을 파악하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이다.
난 어느새 두사람을 비교하고 있었다.
김칫국 마시는 기분이 쏠쏠했다.
아침에는 지하철녀와 나란히 대화를 하면서 왔다.
어느새, 내 출근 모습이 변했다.
인천지하철에서의 단잠을 버렸지만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늘 피곤때문에, 몸이 무거웠는데 한결 여유가 생긴 기분이다.
절대 지하철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출근을 거듭할 수록 지하철녀의 말이 늘어났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다.
주로 주변의 신변잡기이야기를 많이 했다.
또 지인들의 연애이야기도 몇번 들려줬는데, 남자의 성실함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늬앙스를 줬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마케팅녀가 자꾸 의식되는 거 같았다.
*
마케팅녀가 내 자리로 와서 문서작성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생뚱맞긴 하다. 마케팅팀에 고수가 훨씬 많다.
난 기꺼운 마음으로 설명해줬다.
과하다싶을 정도로 내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하는 마케팅녀의 모션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화장품 냄새에 긴장했다.
지하철녀의 옅은 향수냄새와 대비되었다.
난 설명하다말고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서로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녀는 수줍음 속에서도 무심한 듯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내 시선을 기어이 받아냈다.
나도 이내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지만, 뛰는 가슴을 그녀에게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휴게실 근처를 지나는데 마케팅녀와 그녀의 단짝인 기획팀 여직원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아까 고마웠다며 음료수 한잔 사주겠다고 한다.
기획팀 여직원이 평소와 달리 유난히 말이 많았다.
기획팀녀의 묘한 미소를 보며, 이미 마케팅녀는 자신의 단짝에게 나와의 근황을 이야기한 듯 싶었다.
늘 칼퇴근하는 나와 달리 마케팅녀은 야근이 제법 있었다.
기획팀녀가 짐짓 정색을 하고 마케팅녀에게 물었다.
'오늘도 야근이야?'
'아니 오늘은 칼같이 나갈래'
난 심술쟁이가 아니다. 바로 반응을 보였다.
'뭐 좋은 계획 있어요?'
'아뇨... 딱히 할일은 없어요....'
그 어색한 표정에 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집이 어느 방향이에요?'
'당산동이요...'
'어딘지 모르겠네요 ㅎㅎ 전 일호선만 타고 다녀서'
'저도 일호선 타요'
그녀가 버스 타고 통근하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모르는척 반갑게 놀라워 해줬다.
여느때처럼 6시쯤 마케팅녀의 동향을 보며 퇴근했다.
딱히 사전에 약속한 것도 아닌데, 기획팀녀와 마케팅녀 그리고 나는 나란히 걸어 나왔다.
난 자연스럽게 타이밍을 맞췄고, 그녀도 교감한 듯 보였다.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교차로에서 기획팀녀가 일이 있다며, 다른 길로 향했다.
내게 격려의 눈빛을 보내는 듯 했다.
무슨일이냐며 묻는 마케팅녀의 표정이 영 어설펐다.
그래서 더 이뻐보였다.
가을의 석양은 어느새 옅은 주홍빛을 드러냈고,, 기분은 날아가는 듯 했다.
역앞에 지하철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코 앞에서 동글해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언제나 내 청춘은 혹독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