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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바람처럼 마구 스치던 날 #2


신입사원 시절, 사내 최고의 미인은 단연 마케팅팀 여직원이였다.
 

물론 내 말에 표면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냉소적으로 그녀의 미모를 폄하하는 장대리는 예전에 그녀에게 대시했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
관심없는 척 언급을 회피하는 내 동기녀석은 아무래도 그녀를 짝사랑하는 듯 보였다
.
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불친절한 경리팀 팀장은 개인적인 콤플렉스 탓이다
.
 
미의 평가에 있어개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사람들에게서 동정심을 느끼는 걸 보면, 난 참 공명정대한 거 같다
.
어쨌든 난 항상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바, 그녀의 미모를 인정했다
.
 
첫 출근했던 날, 모든 것이 낯설어 자리에 뻘줌하게 앉아 있던 나를, 마치 햇병아리 대하듯 당돌하게 빤히 쳐다봤던 눈빛이 인상적이였다
.
이지적인 인상에 확실히 허영심이 있었다

 
자금담당이던 나는, 업무상 그녀의 지급요청서를 접수할 일이 빈번했다.
오직 순수하고 투철한 고객의식에 입각하여그녀에게 밝고 친절히 응대했다. 때론 내 업무영역이 아닌부분까지도 조언을 시도했다
.
 

'그걸 일일이 다 첨부하실 필요는 없구요, 이거랑....'
 

그녀가 품의있게 내말을 끊는다.

 
'... 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혹시 미진한거 있으면 경숙씨한테 문의하겠습니다.'

 

내 대답도 안듣고 그냥 갔다딱딱한 경어가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무안했다
.
그녀는 나의 한결같은 미소와 친절한 서비스를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큼 이쁘긴 했다.
  
회사 회식으로 생등심 집에 갔다
.
난 원래 고깃집에 가면 가급적 여자들이 많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
남자들만 있는 테이블에선 아무래도 양껏 먹기가 힘들다
.
특히 고기가 익기도 전에 마구 집어먹는 몇몇 인간들과는 절대 합석하지 않는다
.
 
마침 마케팅그녀가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기에편안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가 앉았다
.
그녀가 도도한 눈빛으로 한번 쳐다보더니, 잠시 후 미안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
 

'저 쪽에 일행이 있어서, 오해는 하지 마세요.'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또 무안했다.
   

고깃집에서 술이 과한 것 같아, 잠시 바람도 쐴겸 밖으로 나왔는데, 그녀가 혼자 서있었다.
우연히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그녀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때 뜨거운 눈빛을 보냈을리가 없었다
.
  
억울했다
.
이제 그녀를 대할때 웃지 않기로 했다
.
그렇다고 속좁은 티를 낼 순 없었고,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하기로 했다
.
 
한가지 변수가 있었다
.
사실 그 무렵, 난 개발팀 여직원에게 관심이 있었다
.
어쩌면 개발팀 여직원에 대한 관심 덕분에 마케팅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가능해졌을지도 모르겠다
.
딱히 차갑게 대한 것도 아니고, 말그대로 무관심하게 상대했다
.
몇달이 지나 개발팀 여직원으로부터 닭쫓던 개 처지가 되었어도, 마케팅녀에 대한 나의 무관심 기조는 유지될 수 있었다
.
 
*
마케팅녀가 난처한듯, 내게 부탁을 해왔다
.
고고한 듯한 그녀 역시 경리팀 여직원의 쌀쌀함 앞에선 어쩔수 없었나 보다.

 

'이거 정말 급한 건인데요, 제가 너무 늦게 가져와서, 경숙씨한테 말씀 좀 해주실 수 없나요. 부탁드려요...'
 

별다른 감정이 개입되지도눈부신 미모와 정중함 때문도 아닌, 무념무상의 공정함으로 응대했다.
 

'급한 건이네요, 저희 팀도 입장과 원칙이 있으니 여기 협조전 양식 작성하셔서 부서장 결제 받아주십시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분명치는 않지만 그 무렵부터, 그녀가 내게 한결 겸손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후 업무 문의차 마케팅팀에 가자, 마침 부서원들이 순대, 떡볶이등을 차려놓고 간식을 즐기고 있었다
.
난 업무 문의만 하고 가려했는데, 마케팅녀가 약간 어색한 투로 말했다.

'유월씨도 이거 먹어요'

 
늘 교양있는 듯 정중한 표현을 하던 그녀답지 않은 어중간한 말투였다.

  
그리곤 어색한 손놀림으로 젓가락과 간식을 챙겨주는 모습에서 분명한 수줍음이 드러났다.
그 낯선 모습이 재밌다고 느껴졌다
.
난 크게 손을 내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녀의 수줍음은 나만 알아본 게 아닌 듯 했다. 그녀 옆에 있던 마케팅 팀장의 눈빛에도 이채가 담겨있었다.
 

확실히 그때를 전후해,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해 있었다.
늘 냉냉한 듯 절도 있던 그녀의 이미지도 다소 따뜻하게 바꿨다
.
내게 업무관련 질문도 상당히 많아졌고, 부탁도 많아졌다
.
난 그런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늘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
 
자연스럽고 당당한 응대
...
미모의 그녀로서는, 젊은 총각들에게서 그다지 겪어보지 못했을 법했다.

  
그녀가 처음, 내게 애교비슷한 농담을 건네고 갔을 때는 나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를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덧 관성처럼 구축된 내 진중한 이미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
어쩌면 한번 무관심해진 내 마음은, 자가 체면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
*    
경리팀장이 급히 호출했다
.
소비자 보상금을 급히 지급해 주라고 한다. 자세한 지급방법은 마케팅팀장의 편의를 봐주라고 했다
.
마케팅팀장은 은행 갈때 마케팅녀를 대동하라고 한다
.
이 사실을 그녀에게 통보했다
.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도 내게 응석을 부릴 줄 몰랐다.

 
'제가 왜 유월씨랑 같이 가야 돼죠?'

 
난 어이가 없어서 순간 차갑게 반응하고 말았다.

 
'아 상관없어요나 혼자 가지요'

  
내 반응이 의외였나보다...

 
'...아니요, 같이 가요'

 

눈을 내리깔며 수그리는 모습이 내 마음에 []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지하철녀가 생각났다
.
*
바로 어제였다
.
드디어 난 계획했던 대시를 실행했다
.
이미 지하철역에서 마주한 지하철녀의 눈빛엔 반가움이 담겨있었다
.
작업건다는 표현조차 무색했다

     

언제나처럼 나란히 앉았다.
난 이미 지난 주말내내 오래묵혀주었던 감각을 충분히 헤집어놨기에, 충분히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
어디까지 가세요'
'
종각이요
...'
'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제가 워낙 숫기가 없어서'

 
난 자연스럽게 내 신상을 소개했고, 억지스럽지 않게 그녀의 이야기를 유도했다.
지난 대학시절보다 한결 성숙해지고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
역시 말의 내용보다는 말 할때의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
.
 
그동안의 인상과 달리 그녀는 나름 활달한 성격인 거 같았다
.
수줍은 듯 했지만 이내 자신이 그동안 내게 느꼈던 감정을 털털하게 이야기해줬다
.
주위에 빈자리가 많았음에도, 계속해서 굳이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앉는 내 행태가 당혹스러웠단다
.
근데 늘 무표정했고, 늘 졸기만 하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다고 했다,

 

아마 '호기심' '호감'의 완곡한 표현인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