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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바람처럼 마구 스치던 날 #1


신입사원시절 전철로 통근했다..

집앞에서 인천지하철을 타고 한번 환승하여 경인선으로 서울까지 간다.

타는 곳이 거의 종점이라 승객이 많지는 않다.

인천지하철에서는 거의 졸면서 온다.
환승하고나서는 서서가야 하기 때문에, 늘 피곤한 사회초년생에게 인천지하철에서의 선잠은 달콤했다.

전철에선, 옆자리에 남자가 앉으면 불편하다.

남자는 깡마른 체구라도 어깨가 넓어 양옆에 남자가 앉으면 꽉 끼는 느낌이 영 불편해 싫었다.
뚱뚱하더라고 여자옆에 앉는 것이 훨씬 낫다.

항상 같은 지점에서 전철을 기다리다보니, 비슷한 시간에 전철을 타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난 습관적으로 한 젊은 아가씨 옆에 자리를 잡곤 했다.
늘 깔끔한 정장에 차분한 인상이 보기 좋았다.

거의 매일 아침 마주치는 여자였는데, 딱히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기왕이면 이쁜 여자 옆에 앉는 것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차마 옆에 앉지는 못했으리라...
옆에 앉으면 느껴지는 옅은 향수냄새도 숙면에 좋았다.

처음엔 그녀가 어색한 눈길을 가끔 주는 듯 했으나, 난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그 시간에는 부족한 아침잠을 보충하는 것이 중요했다.
혹시 그녀가 오해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는 무심해질만큼 난 이미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거 같다

*

그날은 좀 깊이 잠들었었나 보다.
어떤 자극에 눈이 떠졌다.
내 시야에 내발과 그녀의 발이 바짝 붙어있던 것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그녀의 몸짓에는 긴장이 배어있었고, 이내 빠른 걸음으로 전철 문밖으로 사라졌다.

환승역이였다. 나도 서둘러 나오며 상황을 정리해 봤다.

그녀가 일어서며 자신의 발로 내 구두를 찬 듯했다.

내가 깊은 잠 때문에 하차할 역을 지나칠까 걱정되었나 보다..
그 고운 마음을 되뇌이며 출근했다..

다음날 그녀와 마주쳤을 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미소를 날렸다. 딴 뜻은 없었다.

그녀는 받지 않고 어색한 듯 외면했다.
그 수줍은 모습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난 당연한 듯,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앉아 있을 뿐이였다.
묘하게 설레이는 마음이 일었다.
학생시절 전철에서 작업을 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지난 시절의 감정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또 다시 환승역에서 그녀의 행동이 기대됐다.
환승역에 거의 도착했지만, 여전히 자는 척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마음이 제법 긴장되었다. 이런게 사는 재미지 않나 싶다.

전철이 거의 멈추도록 그녀의 반응이 없자 큰 실망감이 느껴졌다.

짧은 순간, 내가 이렇게까지 크게 연연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랬다.
역시 불확실한 기대가 더 무섭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그때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발로 내 발을 힘있게 밀치며 섰다. 그리곤 서둘러 문으로 향했다.
전날보다 한결 자연스러워진 듯 했다.
기대가 총족되자 긴장이 풀렸다.

나 역시 급하게 전철에서 나와, 급히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였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도 자꾸 지하철녀가 생각났다.

호감주는 인상에, 풍겨지는 차분한 느낌도 좋았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결심이 서니 마음이 들떴다.
그녀의 마음을 묵살한다는 건 매너가 아닐 것이다.

다음날 아침, 전날과 달리 그녀가 내게 눈인사를 했왔다.
역시 나란히 앉았다. 서로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이젠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막상 말을 붙이려 하니, 쉽지가 않았다.

학생시절과는 또다른 부담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오래전 감을 어느새 상실한 건지도 모르겠다.
긴장이 되서 몇번이나 망설였다.

나의 시선이 자꾸 그녀를 향하자 그녀도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몇 정거장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는 말해야 했다. 왕년에 난 프로페셔널 했다.

맞은 편에 앉아, 열심히 수근대는 고등학생들이 영 신경쓰였다.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학생시절만큼 뻔뻔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새 환승역에 거의 다왔다. 나의 망설임에 그녀도 실망하는 것 같았다.

변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생경함과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입고 있는 정장이 거추장스러웠다.

넥타이는 뻔뻔함까지도 묶어버렸나 보다.

동기와 후배들에게 작업의 정석을 설파하던 과거는 아득하기만 했다.

심심한 주말을 보내며, 다음주에는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있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증명돼야 한다.
더구나 여성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