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20 11:55


지난밤 꿈을 꿨었다.
지하철녀가 어떤 연인을 쫓아가며 울고 있었다
.
연신 오빠를 외쳤지만, 연인들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새벽녘, 의외의 꿈에서 깨어나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개꿈이였다고 덮어버렸지만, 어쩌면 내 무의식은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남영역의 모퉁이는 너무 좁았고, 어느새 바짝 다가선, 두 사람의 멀뚱한 시선은 내게 집중돼 있었다.

 

난 선택을 해야 했다.

이 위기를 데미지없이 넘어가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선택은 즉각적이며, 단호하고 분명해야만 했다.
결코, 절대 어중간해서는 안된다.

난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비참한 실패를 수없이 봐왔고, 난 결코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모진 마음먹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지하철녀가 이미 입을 열었다. 잔뜩 위축된 듯한 표정이였다
.
'
오늘 일찍 퇴근해서, 그냥...'

 

그 위축된 눈빛이 지난밤 꿈 속의 안타까움을 되살렸는지는 모르겠다.
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거 같다. 거의 반사적이였다
.
'
나야 반갑지, 고마워'

 

내 대답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대답자체가 지체되거나 태도가 부자연스럽다면 이미 상처가 될 것이다.
별다른 고려는 미처 하지 못했다.

 

내 반응에 지하철녀의 표정이 다소 밝아진 것 같기도 했다.
'
누구...'

', 회사사람이야'
마케팅녀를 소개함에 있어, 그 어떤 수식어도 붙일 수 없었다
.
마케팅녀가 의식되자 마음이 쓰렸다.

 

'여자친구에요?'
짧은 순간이였지만, 마케팅녀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분명 자신감이 베어있었다
.
마치 내가 부정의 대답을 하리라 확신하는 듯 싶었다.

 

난 반작용하듯 똑부러지게 대답해버렸다.
'
'

나의 대답과 달리 나의 시선은 떨궈졌다.
차마 마케팅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수 있죠?'
나도 어떻게 그럴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혹과 분노의 얼굴로 마케팅녀는 떠나갔다.
저만치 멀어져가는 냉냉한 뒷모습이 무겁게 내가슴을 찔러왔다.

 

지하철녀도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말이 없었다.
지하철녀와 같이 전철을 타고 오면서도 불편한 침묵이 계속 됐다.

 

그녀의 눈빛이 가끔 내 볼을 때렸지만, 난 어색한 분위기를 담담히 감당했다.
지하철녀에게 상황을 설명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
그만큼 마케팅녀에 대한 심적부담이 컸나 보다.

 

환승역에서 내려 다시 걸을때, 기어이 그녀가 물었다.
'
그냥 회사사람이에요
?'
'
'
'
그 사람이 했던 말은 무슨 뜻이에요
?'
'
최근에 많이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여자친구 없다고 이야기했었거든
.'
그녀가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게 더 불편했다.

그렇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늘어놔 봐야 오히려 더 이상할 것같았다.
속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집앞 역에 내려 같이 커피를 할까 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눈빛이 오갔지만, 결국 서로 말없이 헤어졌다.

 

문득 지하철녀에게도 소홀한 거 같아 미안함을 느꼈다.
내일은 지하철녀에게 저간의 사정을 솔직하고 자세히 설명해서 혹 있을지 모를 오해를 풀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밤늦도록 마케팅녀에 대한 자책으로 잠이 오지않았다.

*

다음날 지하철녀가 지하철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역시
...
호출을 했다.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문득 지하철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언니가 어떤 남자와 몇 년간 연애를 했었는데, 지독한 바람둥이였다고 했다
.
자신과 언니의 친구가 몇번이나 그 남자의 거짓말을 증언했지만, 언니는 늘 그의 말을 믿었고 결국 큰 상처를 입었었다는 이야기
...
글쎄, 내가 딱히 거짓말로 의심될 만한 코멘트를 했는지 모르겠다.

 

지하철녀가 음성 메세지를 남겼다.
역에서 마주쳤을 때, 마케팅녀의 옆에서 더없이 행복해 보였던 내 표정을 지울수 없다고 한다. 딱히 내게 이별을 통보하진 않았다.

 

명함에 적힌 회사번호로 연락을 해볼까도 했지만 비참한 기분이 들어 포기했다.
나도 나름 자존심이 있나보다
.
어쩌면 마케팅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지하철녀가 없는 빈자리는, 늘 역에서 마주치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의식한 탓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영 거북했다
.
그래도 그 자리를 고집했다. 어쩌면 기다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변명은 늘 쓸데없는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시의적절한 변명이 때로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

한편 꽤 오랜시간, 마케팅녀는 철저하게 나를 외면했고, 그녀의 단짝인 기획팀녀의 시선은 상당히 거북스러웠다.
나는 마케팅녀에게 업무상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게 서류를 접수시키고, 업무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
그녀에게도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시 내게 마음을 열기까지 상당히 오랜시간이 걸렸다.. 오랜만에 마주한 눈길은 여전히 고왔다.
이는 또 다른 이야기다.    <>


Posted by 비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