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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 #1





구매팀 이대리는 첫인상이 상당히 순해보였다
.
선한 눈매에 말투도 서글서글하다
.
나와는 다른 부서임에도, 신입사원이던 내게, 이것저것 친절하고 세심하게 챙겨줬었다.

 

그러나 반년도 지나지 않아, 그가 함께 일하기 싫은 사람임을 깨달았다.
업무외적으로는 편하게 대해주다가도 업무와 관련이 되면 상당히 예민해졌다
.
절대 책임지지 않고 남한테 떠넘기기 일쑤고, 뭐하나 곱게 해주는 것이 없었다
.
우유부단하고 소심하며 신경질적이여서, 업무적으로 상대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함께 놀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점차 그를 혐오하게 됐다.
어느날 그와 통화하다 그의 억지에 질려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
'그걸 지금 어떻게 해요? 은행도 벌써 영업시간 끝나서 못 받아요.'
'
그건 그쪽 사정이지!'

 

그길로 재경부문장에게 가서, 이대리와의 통화내용을 알렸다.
[
그쪽 사정이지]라고 표현했음을 분명히 말했다
.
나를 평소에 좋게 보셨는지, 부문장은 내 철없는 고자질을 진지하게 들어줬다.

얼마되지 않아 이대리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아마 부문장은 구매팀장에게 한소리했을테고, 이대리는 팀장에게 꾸사리 좀 먹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저런 인간에겐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난 웃음을 지어보이며 당당히 맞았다. 내 딴엔 미소라고 생각했지만 아마 조소로 비쳐졌을 것이다.

 

명분이 없었고, 소심하기까지한 그는 내게 화를 내지 못했다.
괜히 엉뚱한 회사불만만 늘어놓다 돌아갔다
.
그 때부터 이대리와는 더욱 껄끄러운 관계가 됐다

 

그 날 이후 이대리는, 나와 관련된 업무연락은 모조리 구매팀 여직원에게 넘겼다.

구매팀 여직원은 늘씬하지는 않지만, 큰 키에 체구가 좋은 털털한 인상이였다.
늘 밝은 얼굴에 붙임성도 좋았고, 호감가는 얼굴이다.

 

입사한지 두어달 된 그녀는 아직 업무가 미숙했고, 이대리는 업무인계나 교육에 상당히 인색했다.
그녀가 위축된 얼굴을 하고, 처음 업무서류를 가지고 왔을 때, 작성된 내용이 너무 허술해서 황당했다
.
업무와 관련해서는, 늘 가르쳐 주는 것에 인색한 이대리를 떠올려 보면, 그녀의 맘고생이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친절하게 서류작성을 도와줬다.

 

그녀는, 싫은 내색없이 자세히 설명해 주는 내게 상당히 고마워했다.
아마 이대리의 냉대를 받다 와서 더욱 그렇게 느꼈을 듯 싶었다
.
위축됐던 얼굴이 조금 펴지는 것을 보며, 내가 구매쪽 업무에 정통하지 못해, 많이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사람 마음이 묘해서, 내 딴에는 챙겨주는 후배라고 생각하는데, 자꾸 '유월씨'라며 이름을 부르는 것이 거슬렸다.
문득 그녀도 내 거슬리는 마음을 느꼈는지 '선배'로 호칭을 바꿔부르며 씩 웃어줬던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구매팀은, 자금팀에서 승인된 출금증을 받아 은행에서 직접 구매자금을 결제했다.
간혹 은행에 갔는데, 예기치 못한 서류 누락이나 결제액 변경등이 발생하면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약간 덜렁되는 구매팀녀는 간혹 그런 실수를 했고, 난 언제나 웃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녀를 도왔다. 서류 배달을 대신 해주기도 했다.

 

차츰 은행에서 마주치면 같이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공원에서 군것질을 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이대리 험담도 하고, 학생시절 이야기도 하며, 나른한 일상에서 즐거운 일과가 되어 갔다.

 

구매팀녀가 나와 가까워지는 만큼 이대리의 견제와 딴지는 더욱 커져 가는 듯했다.
늘 털털한 듯 보였던 그녀 얼굴에 수심이 늘어갔고, 이대리에 대한 불만의 이야기도 점차 많아졌다.

*

구매대금 지급 스케즐 통보에 오류가 발생했다.
처리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
회사내부 결제야 어떻게 달려가서 받는다해도, 이미 은행영업시간이 다 끝난 마당에 보유외화도 없었고, 즉각적인 조달도 불가했다.

구매팀에선 난리가 났다.

이대리는 모든 잘못을 구매팀녀에게 돌렸다.
구매팀녀는 얼굴이 잔뜩 붓도록 울었다.

 

그날 회사근처 호프집에서 구매팀녀에게 술을 사줬다.
따뜻한 말을 건네자, 서러움에 복받친 울음을 얼굴 가득 머금었다
.
늘 밝기만 하던 그녀도, 그동안의 회사생활이 많이 외로웠던 거 같다.

 

구매팀은 1층에 있었다.
여직원들이 있는 부서는 대부분 4층에 있었기에 그녀와 특별히 친한 여직원은 없는 거 같았다
.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는 털털한 성격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처럼 울쩍한 날에 함께 위로해줄 다른 여직원이 없다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녀가 회사 여직원들과 더 많이 어울렸다면, 여직원들의 소문에 민감했던 이대리에게 압박으로도 작용했을텐데, 아쉬웠다.

 

술자리가 깊어가면서, 그녀의 마음도 많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

손거울을 보다가 퉁퉁 부은 얼굴이 부끄러웠는지머슥한듯 수줍게 웃어보였다.
늘 편하고 부담없는 동생처럼 느껴지던 그녀도 결국 '여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때 마케팅팀 직원들이 우르르 호프집으로 들어왔다.
아마 팀 회식 후, 2차를 온 모양이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마케팅녀도 있었다.

눈물 범벅인 여인과 단둘이 있다가 마케팅녀를 맞으니, 문득 예전 남영역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예전 바람처럼 스쳤던 인연은 아득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