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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곳


동아리 엠티를 갔다.

참여 멤버를 보니, 파릇파릇한 신입들과 2학년 집행부가 대부분이였다.

내 동기는 여자 동기하나 뿐이고, 내 위로 한명이 더 있을 뿐이다.

난 그야말로 노땅이였다.

 
이런 멤버 구성에 노땅이 참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일학년때의 기억때문이다.
 

점잖은 선배가 엠티에 참여했었고, 노래마당에서 망가지면서 열정적으로 흥을 돋았다.
정말 노래도 못했고, 춤도 어설펐지만, 후배들은 의외의 모습에 대단히 즐거워 했다.
그 선배도 참 곤혹스러웠을 텐데, 용감하게 몸을 흔드는 열정이, 바로 애정이 듬뿍 담긴 동아리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였을 것이다.
그것이 문화가 된다면... 
어쨌든 감동적이였고, 인상적인 기억이였다.

 

이제 내가 그 위치가 되었고, 난 좀 다른 식으로 동아리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참여로 인해 내 동기 여학우가 참여했고, 내 밑의 고학년 여학생들이 다수 참여했다.
왕자의 관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가평까지는 멀었다.
최고참 연장자와 나란히 앉아서인지 더욱 멀고 지루했다.

 

예전부터 끌리는 여후배가 있었다.
한 학년 아래 후배로 줄곧 친하게 지내온 약간 약은 여우같은 후배다.
1,2 학년 시절 많은 남자를 울렸지만 나같이 실속은 없었는지, 지금은 특별히 사귀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로 딱히 따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때때로 서로 서먹서먹함을 느낄 정도로 호감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 여우 후배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고 학년임에도 설겆이를 비롯한 잡일을, 스스로 나서서 열심히 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나를 의식한 행동이란 막연한 상상으로 기분이 흐뭇해 졌다.

평소 그럴 스타일이 결코 아니다. 과연 여우답다. 그래서 귀엽다.
익숙해 보이지 않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이것저것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이뻐보였다.

  

캠프 파이어를 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서 노래를 불렀고, 후배들의 공연도 있었다.

은근슬쩍 여우후배 옆에 가 섰다.
일학년 시절, 호감을 느끼던 상대일수록 오히려 부끄러워서 멀찍이 섰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순수함을 잃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후배들의 감미로운 연주와 노래,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늦은 밤의 순수한 낭만과 모닥불의 흡입력에 취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모습이 되어 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기에, 설레이는 마음이 더했다.
불확실성이 주는 묘한 매력 속에서 난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어쩌면 새로운 인연이 될 지 모를 기대감을 키워 갔다.
이 순간의 야릇한 긴장이 깨질까 두려워, 난 어떤 말도 미동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코 앞의 모닥불에서 불티가 티며 순간적으로 불길이 사방으로 크게 일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 섰다.

 

난 움직이지 않고 뜨거운 열기를 모두 받아냈다. 그야말로 돌처럼 굳건했다.
듬직했을 내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러났던 후배가 조심스레 다가와 다시 내게 살며시 기댔다.
그녀의 확실한 의사 표시에 편안히 깊어가는 가을 밤의 운치를 즐길 수 있었다.

 

아마도 여러 시선에서는 자유로울수 없었을 것이다.

 

캠프파이어를 파하고 술자리가 이어졌다.
여우 후배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집행부 간부들의 술을 받아야만 했다.

 

술이 제법 취하자 전임 회장이, 자리를 후배에게 맡기고 물러나던 때의 소감을 담담하게 술회했다.
난 깊은 눈으로 별을 세는 모습만 연출했다.
이런 경우에 노땅이 말 많이 해봐야 별로 멋없다. 녀석이 내게 바라는 것도 경청이였을 것이다.

  

이런 점잖은 연출은, 결국 한쪽에서 가끔 시선을 주는 여우 후배를 의식한 탓이리라.
지루한 연출 중에도 무서운 집중력을 보인 나의 레이다는, 기어이 여우후배가 자리를 뜨는 것을 감지해 냈다.
사실 힘든 일도 아니였다. 그녀가 일어서며 보내온 시선은 내게 함께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듯 했다.
  

난 교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당히 분위기를 헤치지 않게 자리를 나섰다.

 

여자 동기가 뒤에서 불렀다.
가슴 속에 구멍이 뚫린듯 휑했다.
세상일 다 뜻대로 되길 바랄 순 없다.
왕자는 손내미는 여자에게 모질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몇년을 함께 한 동기가 아니던가...

  

그러나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분명 아까 캠프파이어 앞에서 나의 로맨스를 목격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리 비협조적으로 나오다니...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동기도 속이 쓰렸을 것이다.
어쩌면 여학우 사이에서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은 여우 후배에 대한 견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후배를 보호하려는...? 그럴리는 없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동기와 달빛아래에서 다소 억지스런 추억이야기를 해야 했다.
동기는 대단히 친절했고, 나의 이야기에 과도하게 웃어 줬다.
옛 생각과 편한 우의에 나도 기분이 괜찮았다,
뒷통수는 무지 간지러웠다.

  

다음 날 출발을 앞두고 피구를 했다.
남자는 왼손으로만 던지기로 했다.

내가 왼손잡이 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기나 몇몇은 알텐데 생각을 못해냈나 보다.
 

왼손잡이 티를 안내려고 살살하려 했지만, 공을 던질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위력이 가해지고 말았다.
완연히 왼손잡이 의심을 받으며, 남자들을 모조리 아웃시켜 버렸다.

상대편에는 여우 후배와 또 다른 여자 후배만 남았다.

  

내 동기의 눈빛은 잔인한 공격을 내게 강력히 종용했다.
철없는 남자들은 만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 오히려 어색한 모습을 보이기 쉽다.
아마 이런 경우에 장난을 가장한 냉정한 공격을 하기 마련일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야말로 남자의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자기 모순적인 남자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난 차마 이쁜 여우 후배를 공격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애교로 버무린 일격에 아웃당했다.
썰렁한 야유를 소화하며 물러났다.
동기가 던진 분노의 일격에 여우 후배도 바로 아웃됐다.

  

어제의 실례는 충분히 만회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기차는 동기와 같이 앉아야 했다.

동기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많이 뻔뻔해 졌다.
어쩌면 친구처럼 친밀감이 커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랜만에 동기와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 지루하지 않게 서울까지 왔다.

 

드디어 청량리 역에 도착했다.

  

여우 후배를 마중하러 온 하얀색 에스페로가 대기 중이였다.

우리에게 수줍은 듯 인사하고, 이내 환한 웃음으로 차로 향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짧은 순간 내게 어색한 눈빛을 던졌던 것 같기는 했다. 그게 다엿다.

 

역시 세상일 다 뜻대로 되길 바랄 순 없다.

 

저녁에 동기가 술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