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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적을 만나다 #1


홍.
키 190정도에 길죽한 얼굴, 깡마른 체격, 지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풍모.
철저하고 치밀한 성격이며 무슨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난 그에게서 민족과 국제 정치역학을 배웠고, 어설픈 영어발음을 교정받았다.


아리조나로 어학연수 와서 만난 그는, 내 주변 남자 유학생들에게 공공의 적이였다.
나야 군대를 안가서 유학생들 중 막내였으니, 별 생각 없었는데, 또래의 형들에게는 그의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홍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들어온 랭귀지스쿨 입학동기였다.
특히 홍과 나 그리고 다른 두명의 형은 낯설고 서먹한 이국땅에서 처음엔 쉽게 어울렸다.


한인슈퍼에 같이 가서 식자재를 사오기도 하고, 기숙사 휴게소에서 함께 탁구도 치는 등 서로 의지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나 점차 랭귀스 스쿨이나 한인교회, 기숙사 커뮤니티를 통해 새로운 사람, 특히 여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알게 되는 여자들마다 '홍'만을 주목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유쾌해 했고, 그의 눈길에 긴장했다.

함께 있던 두 형들은 간혹 '옛다 관심'하며 던져주는 시선에 황홀해하면서도 홍에게로 명백히 집중되는 시선을 인정하지 못했다.
외면과 무관심속에서 형들은,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 투기의 대열에 몇명의 형들이 더 동참했다.

귀하다는 김치 얻어가고, 전기밥솥 빌리고, 세탁세제 빌리는 등 뭇 여성의 호의를 만끽하며, '홍'은 그렇게 썰렁한 형들 무리에서 점차 독립해 갔다.

홍은 숱한 여자들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무심하기만 했고, 홀로 영어공부와 운동, 그리고 아르바이트(학생비자는 취업이 불가하여 불법 아르바이트)에 열심이였다. 거기에 틈틈이 주변을 홀로 다니며, 취미인 사진 촬영도 즐겼다.

난 솔직히 홍한테 붙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홍과 더 친하게 지냈다면 영어실력도 훨씬 늘었을 테고, 알찬 유학생활을 보냈을 듯했다.

카지노나 술집을 전전하고 고스톱으로 소일하는 형들이 한심했다.
무리를 등진다는 것이, 아직 어린 내게는 벅찬 일이였나 보다. 나중에 뒤늦은 독립을 시도하며 더 큰 부담을 안아야 했다.

*

일본 명문대 석사출신이라는 지적인 미찌꼬.

기숙사 안마당에서 마주칠때마다 항상 환한 웃음을 보이며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미모가 뛰어난 것은 아니였지만,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언제나 사근사근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당시 이십대 후반이던 형들에게 서른을 훌쩍넘긴 그녀의 매력은 이상향과도 같았다.


초저녁이면 습관적으로 기숙사 안마당을 서성이던 형들은 햇살과도 같은 그녀의 맑은 미소를 향유하며 제각기 불가능한 도전을 꿈꿨드랬다.

언제부터인가 초저녁의 기숙사 앞마당에서 미찌꼬를 볼 수 없었다.
아마도 홍과의 왕래가 많이 소원해 졌을 무렵이였던 거 같다..

난 직감했다. 미찌꼬가 형들에게 친절했던 건 홍과 친구였기 때문이란 걸...
눈치없는 인간들에게 그 사실을 적시해줄 만큼 난 강심장이 아니다.
그냥 가서 티브이나 보고 싶었는데 자꾸 군대이야기나 과거 자신들이 여인들의 우상이였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들으며 지루하고 기약없는 기다림에 동참해야만 하곤 했었다.

얼마 후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미찌꼬는 어두운 표정으로 우리를 피했다.
형들은 절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나도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좁은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곧 소문이 돌았다.
미찌꼬가 홍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했고, 홍은 차갑게 거부했다는...
그 지적인 미찌꼬가 눈물로 매달렸다는 믿지 못할 소문이였다.

형들은 그 이야기에 대한 코멘트는 피한 채, 홍의 수수한 옷차림과 구두쇠같다는 성격만을 욕했다.


*

기숙사 멤버 중 한국인 새침 콤비가 있었다.
나랑 동갑인 샌디와 한 살 많은 쩡아. 둘은 항상 붙어 다녔는데, 둘다 미모도 출중하고 새침해서 남자들의 관심을 자극했다.
형들은 건방지고 재수없다고 욕했지만, 막상 그녀들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특히 다소 작은 키에 도도한 쩡아는 자기의견이 분명하고 쌈빡한 면이 있어 형들의 농담을 대차게 잘 받아주었다.
그 신선함에 형들은 쩡아의 주목을 받고자 서로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를 토해내기도 했다.


차를 얻어타고, 한인교회에 가서 오랜만에 비빕밥을 실컷 먹고 온 날,
홍과 새침콤비, 그리고 두형과 나는 기숙사 뒷편에 모여 교회에서 얻어온 떡을 맥주와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떡이 남는다면 아마도 알뜰한 홍이 싸갈 것이다.

유난히도 큰 보름달이 열대의 나무 사이에서 여름밤의 정취를 더했다.
형들도 오랜만에 만끽한 포식에 조용히 운치를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쩡아가 문득 어울리지 않는 다소곳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대를 사랑해 그대 곁에 있고 싶어요. 나도 그대가 좋아 이 세상 모두가 변한다 해도...'

가요 [사랑의 대화] 한구절이였다.

쩡아의 시선은 보름달을 향했지만, 분명 수줍은 듯 홍을 의식했다.

둔한 형들도 이를 느꼈는지 경악스런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정작 저 낯뜨거운 노래의 수혜자는 무심했고, 의도치 않은 관객들은 비참함을 느끼며 민망해 해야 했다.
나도 화가 났다. 우리도 '남자'인데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저 뻔뻔함에 기가 찼다.

저 자존심 강하다는 쩡아가 우리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겠다.

언제나처럼 홍은 무표정이였고, 쩡아는 그리 원망하는 표정도 아니였다.

뒤늦게 수줍은 것을 느꼈는지 몸을 돌려 어둠속으로 총총이 사라졌다.
샌디가 그 뒤를 따랐고, 홍은 남은 떡 수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버려진 어둠의 자식들은 상처와 고독에 방치되었다.

형들의 분노에 처음으로 공감했다.


홍이 여자에게 완전히 무심한 것 같진 않았다.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필요한 물건을 구해주는 등 나름 자상한 면이 있는 듯 했으나, 딱히 누군가와 사귄다는 소리는 못들었다.

아무튼 홍은 외로움을 모르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