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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2

5시 정각에 맞춰 열람실 문밖에 있는 난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나름 멋진 폼을 연출하고 섰는데 15분이 넘도록 나오질 않는다.

자세 유지하기 힘들었다.
마침 지나가는 친구한테 대출창구에 이쁘장한 여학생이 앉아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자리에 없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당장 내일 오후 도서관에 가야할지도 망설여졌다.

 

당연히 책에 대한 나의 열정을 억누르기는 힘든일이다.

책 대출한도를 고려해서, 일단 오전에 대출한 책을 모두 반납해놨다.
 
어제의 상황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지만, 소극적인 성격이라면 꼭 실망할 일이 아닐수도 있다..
대면하면 판단 할 수 있으리라....

 

또 대출 받으러 갔다.

당당히 그 눈빛을 살폈다.
먼저 말할 때까지 학생증을 내밀지 않았다.

 

'저기... 학생증...'
 

수줍은 눈빛에서 차가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케이 !!

적어도 한번 해줬던 대답은 또 해줄 것이다.
원망한다는 인상을 절대 느낄 수 없도록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르바이트 몇시에 끝나요?'
'5시요'
'5시에 문앞에 있어도 되겠어요?'
'....'

 

충분하다. 여운은 남겨야 맛이다.

 

5시에 맞춰 어제와 동일한 포즈를 재현하려고 하는데,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역시 진달래였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실례한다느니, 사과 운운하는 것은 분위기만 어색하게 할뿐이다.
'지극히 소극적'인 진달래에게는 [능청]과 [뻔뻔함]이 키워드다.

진달래가 아주 미세한 목례를 하는 듯 했지만, 아무 말없이 나란히 도서관을 걸어나왔다.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역시 난 마음이 순수하니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얼굴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밥먹으러가자느니, 뭐 먹고 싶냐느니 다 부질없다.
아무말없이 나란히 걷자니 기분도 설레이고 좋았다.

 

제법 분위기있는, 그러나 저렴!한 돈까스집으로 갔다.
저녁먹기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대화 부재의 맹점은 감수하기로 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와 이 자리까지 온 과정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분위기가 우스운 방향으로 흐르기 쉽고, 주도권 잡는 데에도 도움될 게 없다.
학번이 딸리니, 신상이야기도 역시 가급적 피했다.
그러고나니 할말이 너무 제한적이였다.

근데 대화를 해보면서 단순히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라 뭔가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난 능청맞게 대화를 주도했지만 문득 대화가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다지 진솔하지 못했던 걸 반성하면서 일단 헤어졌다.
딱히 연락처를 요구하진 않았다. 도서관으로 찾아가면 될테니...

 

다음날 도서관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진달래가 눈인사를 했다.

반색하는 듯 했다.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일이다..

그래서 또 책을 빌렸고, 5시를 운운했다.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다.
아까 책을 빌릴때 분명히 느껴졌던 반색과 달리, 어두운 빛이 얼굴에 베어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내내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내가 동아리에서의 유쾌했던 이야기를 해줬을때 그 반응이 의외였다.
표정이 우울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전철타고 오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는 언제나 여운을 남긴다.

 

다음날 아침 동아리방에서 있는데, 선배누나가 매점가서 이야기좀 하자고 했다.

선배누나가 뜸끔없이 진달래와의 관계를 물었다.
우연히(?) 알게되서 저녁 몇번 먹은 사이라고 했다.

선배의 말에 따르면, 진달래는 동아리 아무개형의 연인이라고 했다.
지금은 서로 냉전 중이지만 쉽게 헤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다.

 

특별히 내게 제안한 것은 없었지만, 그 표정이 단호했다.
언제나 내게 친절했던 선배의 차가움이 섬찟했다.
가슴 한 구석이 휑했다.

 

동기녀석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야 그런게 어딨어? 신경쓰지 마.'

 

녀석의 소탈한 표정이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날 오후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주말이 가고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다.

도서관에 가자 진달래가 반가운 미소로 나를 봤다.


마주하는 내 표정이 어두웠나 보다. 진달래의 표정에서 이내 미소가 사라졌다.

그게 미안해서 또 책을 빌렸다.
말없이 학생증을 내미는데, 내가 시선을 외면했었나 보다.

 

'기분 안좋은 일 있어요?'

 

의외의 말에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니요. 5시에 괜찮지요?'

 

캠퍼스를 거닐고, 저녁을 먹는 내내 그다지 대화가 없었다.
주말에 내 입장에 대한 분명한 결정을 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되었다.

일단 오늘은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속히 입장정리를 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금지된 만남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어쩌면 이미 난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밥먹다 말고 어두운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나 보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놀랬다.

진달래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 편하게 이야기 할께. 내가 나이도 많잖아.
 너한테 호감이 있었어, 생각 많이 했어. 근데 역시 안되겠어.
 내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이해해줘...'

 

책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눈인사를 보낸 후 돌아서 저녁값을 계산하고 나갔다.
눈인사를 보낼 때 그 표정이 편안했다. 그래서 따라갈 수 없었다.

여지껏 볼 수 없었던 표정이였다.

 

하루키의 책이였다.

책을 펼쳤다.

 

얼마전 내가 준 진달래 꽃잎이 곱게 말라 있었다.

 

봄날이 갔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