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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 #1

동아리 친구들과 학교 잔디밭에 대충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이곳엔 옹기종기 모여앉아 술마시는 팀들이 꽤 된다. 

후배가 앞쪽에 모여앉아 있는 여학우 무리를 가리켰다.
'우와, 저기 저 여자 괜찮지 않아요?'

모두의 시선이 그쪽 무리에 쏠렸다.
네명이 모여앉아 있는데 유독 한명만 눈에 들어왔다.
옷차림과 화장이 학생답지 않게 야했다.
아무튼 이뻐보였다.

 

까다로운 내 동기녀석이 콧방귀를 꼈다.
'야, 저게 뭐 괜찮아? 옷만 야하게 입었지. 화장지워봐! 못알아볼껄?'

이 녀석은 늘 이런식이다. 나의 우상 김희애도 무시하는 녀석이니...

 

놀랍게도 바로 그 야한 여자가 우리에게 접근해 왔다.
'이거 좀 따주실수 있나요?'

맥주병을 내밀었다.
까다로운 녀석이 반색을 하며, 냅다 맥주병을 받아 라이터로 멋지게 땄다.
녀석이 맥주병을 돌려주며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원수도 딱 맞는데 같이 드실래요? 우리 안주랑 술 많은데, 계속 따드리기도 편하고...하하'

 

역시 녀석답다...

 

예기치 못한 합석을 하게 되었다.
야한여자를 빼곤 다 수수한 차림에 순진한 얼굴이였다.
남자들의 시선은 야한여자에게만 집중됐다.

후배녀석이 여자들의 면면을 살피더니, 내게 인사를 살짝 건네곤 슬며시 일어났다.
이 후배야말로 진짜 까다로운 녀석이라고 생각됐다.

 

이제 남은 건 우리 동기 셋이다.
나 빼고는 모두 재수를 했는데, 아까 까다로운 척했던 수다맨과 큰 키에 늘 과묵한 척 인상쓰는 인상파다.

 

야한여자 혼자서 우리 동기 셋을 잘도 대작했다.
다른 여자 일행들은 숫기가 없는지 그저 어색한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였다.
물론 우리들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야한여자는 말도 잘했고 술도 잘했다.
수다맨이 계속 침을 튀겨 가며 끈적끈적하고 아슬아슬한 농담을 연발했다.

'ㅎㅎㅎ 걔는 목하고 가슴사이, 네, 바로 여기쯤에... 뽀드락지가 나서 목까지 올라오는 티만 입고 다니고 있어요 '
녀석은 그게 정말 재밌으라고 떠들어대는 것 같았다.

 

'요즘 이쁜 반창고 많이 나왔어요. 반창고도 괜찮은 패션 아이템인데... 호호'
근데 잘도 받아넘기는 그녀의 능청에 놀랬다.

삼류농담이 어색한 공기를 치우고, 자연스런 분위기로 쉽게 돌릴 수 있음을 보았다.
무게잡던 인상파도 그녀의 능청에 부쩍 흥미가 생긴 듯하다. 때때로 웃으며 농담에 동참했다.
얘기를 해보니 그녀는 나보다 두살이나 많았고 집은 나랑 같은 인천이였다.

 

수다맨이 기분좋게 노래방 갈것을 제안했고, 야한여자는 쿨하게 동의했다.
야한여자가 망설이는 여자 일행들을 구슬려서 노래방에 와 앉았다.

 

아까 술자리에서는 한가지만 확신 했었다.
야한여자가 수다맨한테 관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노래방에 와서 한가지를 더 확신했다.
야한여자가 인상파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노래방의 반짝이는 조명아래에서 그녀가 인상파에게 건네는 눈빛은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너무 야한 스타일때문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별수 없다.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전히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집요하게 야한여자의 관심을 끌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수다맨의 모습이 안돼 보였다.
성격 차이다. 문득 저런 성격도 나쁠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난 마음을 비웠고. 관심을 버렸다.
자존심이라도 살리고 싶어나 보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야한여자도 느낀듯했다.
내 눈치는 신경안써도 되겠다고 마음을 정한 듯 싶었다.
귀찮게 하던 수다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야한여자가 인상파에게 한층 강화된 관심의 눈길과 코멘트를 보냈다.
'예전에 알던 오빠 생각이 나네요, 노래가 정말 분위기 있어요'
충분한 의사표시였다.

그만큼 내 기분은 더 지저분해졌다. 사실 저 자식은 노래도 잘 못한다. 나야말로...

 

인상파는 별 반응없이 담담했다. 녀석은 여자앞에서 늘 과묵한 척한다.

두녀석이 동시에 자리를 비웠을 때, 정말 서먹서먹했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일행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노래방이 파하고 난 대충 얼릉 가려고 했는데
인상파 녀석이 서둘러 먼저 갔다.
야한여자의 얼굴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이 스쳤다.
오늘 까다로운 녀석 또 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수다맨이 그녀가 자신에게 꽂혔다면서, 인상파에게 먼저 가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둘은 그런 사이다. 인상파는 여자앞에서 늘 터프함을 드러내지만 수다맨앞에선 순한 양이다.
그러면서도 맨날 붙어다니는 거보면 신기했다.

 

나도 서둘러 인사하고 나오는데, 야한여자가 수다맨의 강력한 3차 제안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내게 달려왔다.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자고 했다.
꿩 대신 닭된 기분이 별로였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동행했다.
그녀와 일행 중 한명이 더 포함되어 3명이서 전철을 타고 내려왔다.

 

한명이 중간에서 내리고 둘이 되자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실 자신들은 이곳 학생이 아니고 근처 학교 신입생이라고 한다.
자신이 학교를 상당히 늦게 입학하여 동기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친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란다.
아까도 숫기없는 동기들과 가까워지고 싶어 우리와의 합석을 받아들인 거라고 했다.
사실은 우리와의 합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유도한 것일거다.

 

갑자기 조신해진듯한 말투와 표정이 낯설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아까 인상파에게 어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기 반성일지도 모르겠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 같다.

전철을 타고 오는 내내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몇몇 남자들의 부러운 듯한 시선을 받자 기분이 괜찮아 졌다.

역에서 내려 걷는데, 그녀가 커피한잔 하고 가자고 제안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부담스러웠는데, 이쁜 얼굴 앞에 두고 냉정해 지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난 자존심보다 매너를 소중히 하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