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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팀 여직원 #1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경리팀으로 발령났다.

 

어쨌든 설레이는 마음으로 출근해 팀원들과 인사를 했다.
여직원이 한명 있었는데, 큰 키에 외모도 반반했다.
첫인사를 나눌 때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입사 3년차로 나보다 두어살 어린 듯 했다.

 

그러나...
조금 지내보니 성깔도 있고  말투가 퍽 딱딱했다.
누구한테도 지는 걸 싫어했고, 너무 깐깐하다보니 다른 부서사람들이 불편해 했다.
여직원의 주업무는 현금출납 및 전표접수인데, 타부서 사람들과 마찰도 제법 있었다.

 

서류의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있으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으며, 접수기한 어기면 일말의 가차없이 접수를 거절했다.

업무 원칙을 따른다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말투나 태도에서 상대하는 사람이 필요 이상의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면 분명 문제다.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이겠지만, 때로 돈 내주는 업무에 기대어 호가호위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으례 딱딱한 태도는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냉냉한 그녀 앞에서 전표를 제출하고 현금을 받아가야 하는 타부서 사람들은 으례 공손히 인사하지만,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다.
경리팀 여직원의 태도가 업무적으론 잘못됐다고 볼 순 없다. 그래도 보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간혹 단짝 여직원과 이야기할 때를 빼곤 웃는 모습을 보기도 힘들었다.

 

내게는 이제 막 입사해서 모든것이 조심스러웠던 때였다.
여직원이 내게 선배대접을 받고 싶어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업무나 회사규정관련해서 별 같잖은 것을 지적하면서 자꾸 선참노릇을 하려들었다.

 

또 내 앞에서 일 잘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팀장이나 다른 동료들과 업무이야기를 할때마다 자꾸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금방 밑천이 드러나거나 오히려 망신을 당해서 안돼보인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기도 했다..

 

사실 여직원은 일을 그다지 잘 하는 편이 아니였다.
팀장이나 상사한테 꾸사리도 자주 들어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민망했던 적도 많았다.

 
어느날
마침 여직원과 마주보고 있는데, 팀장이 칸막이가 공고하게 처진 자리에 앉아 점잖게 한마디 했다.
'마감 빨리 해야지, 우리팀에 아직까지 개인경비 제출안한 사람있어?'

 

뜨끔했다.
그녀에게 능청맞은 얼굴로,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쉿'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어이없는 반응을 봐야만 했다.
'뭐 어쩌자구요?'  '유월씨 빼고 다 받았어요'

 

무안했다.
살면서 그다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홀대였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캠퍼스에서나 통하던 능청이였던가...
여직원의 정서에 문제가 있거나 나에 대한 견제심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

회사에서 희망자에 한해서 뮤지컬 관람 신청을 받았다.
팀장이, 상당히 비싼 거라며 회사에서 무료로 보내줄때 가보라고 한마디 했다.
바짝 군기 잡힌 신입사원이였기에 별 취미 없는 뮤지컬 관람을 신청했다.

 

막상 관람 당일이 되자 다른 일이 생겨 못가게 되었다.
뮤지컬 잘 보고 오라는 팀장의 인사에, 관람 불가를 이야기 하자
팀장이 갑자기 화를 냈다.
'이게 다 돈주고 표 사는 건데, 못 볼거면 미리 얘기를 해야지. 취소도 못하고 돈만 버리는 거잖아'
당황해하고 있는데, 여직원이 한마디한다.

 

'팀장님, 전 미리 얘기해서 취소했어요'
갈수록 가관이였다.
허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인사팀에서 가족주간이라면서 팀별로 가족의 의미에 대해 토론한 후 리포트를 내라고 했다.
별 걸 다 시킨다.
팀원이 모여 대충 의견을 정리하여 리포트를 정리했다.

 

그 날 조촐히 팀회식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게 되었다.
과장이 홍일점인 여직원에게 가정분위기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여직원은 퍽도 말주변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집에선 거의 대화가 없다고 했다.
집에 오면 바로 방에 들어가서 나올 일도 없다며 그다지 가정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직원은 눌변이였고, 가끔 의견을 말할 때 말투가 너무 빨라서 사람이 가벼워 보였다.
반반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직 그녀에겐 벅차다는 느낌이다.
 

회식을 마치며 나와 나란히 둘이 걷게 되었다.

어두운 밤 술기운이 돌아서 인지,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사무실에서 가끔 덥다고, 바지 좀 걷어 올리지 마요 ㅎㅎ'
어색한 수줍음을 보이며 몇 마디 던지는 모습이 영 낯설었다.
어쩌면 내게 관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도 했었다, 나를 워낙에 쌀쌀하게 대해온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사귀는 것과 자신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관심을 주는 것에 아직 서툴어 보인다.
게다가 직무의 특성상 사람들이 잘 대우해 주는 것에도 익숙했기에, 타인을 배려하는 연습이 부족해 보였다. 
순수한 면도 있다. 철이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이해하며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경험은 나보다 많지만 아직 사회인으로서 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그녀도 언젠가는 성숙해 갈 것이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결코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내가 여직원을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다.


직무상 그녀는 현금지급이나 소액 이체를 하였고, 난 수백에서 억단위 이상의 이체 업무를 했다.
오후에는 은행갈 일이 많았는데, 사무실 자리를 비워야 할 때 이체할 일이 생기면 미리 그녀에게 대신 이체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전임자 때부터 있어온 관행이였다.

 

하루는 은행을 나갔다가 중요한 이체건을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급하게 사무실로 전화해서 여직원에게 이체를 부탁했다.
또 황당한 반응을 들어야 했다.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해요?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하라구요.'
언제나처럼 허허 웃으며 부탁하고 끊었지만 속에서 열불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직원이 특별히 못된 것은 아니고, 결국 해 줄 건 다해주는 것도 알지만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관계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