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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호수에 젖고 #2


 

...우리가 어느별에서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
                                                    -
안치환 '우리가 어느별에서' -

*

문희가 내게 배정해준 곡이다.
팬플릇으로 소화하기에 아주 편한, 4분의 4박자, 저음의 느린 곡이다.

가당찮은 실력의 내게 듀엣을 배정해 준 걸 보면 많이 신경써 준 셈이다.

하지만 당시엔 그런 배려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듀엣 파트너였다.

 

왜 하필 복순이냔 말이다.

 

현중이 녀석은 동아리 최고의 얼짱과 듀엣을 배정 받았다.
이 부당한 처사에 분노가 치밀었다
.
실망이 크다보니 별 어처구니 없는 장면까지 연관지어졌다.

 

며칠 전 문희의 생일날, 현중은 문희의 키만한, 눈부시도록 하얀 곰인형을 선물했었다.
학생식당 식권을 줬었다. 구겨진 보통식
...
당시 상당히 기뻐하면서 받아놓고서... 이제와 뒷통수 맞은 기분까지 들었다.

 

함께 하길 기대했던 교육학과 여후배는 8인 합주에 배정됐다.
차라리 거기 끼고 싶었다.

 

이번 결정은 문희의 심술이라는 의혹마저 들었다.
문희는 내 취향을 비롯해 ''라는 인간을 파악하고 있다
.
생각할수록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모질지 않아 다행이다. 공연을 보이콧한다느니 하는 중대결심은 하지 않았다.
단지 인상만 확 구겼다

나의 불만을 느꼈는지, 문희와 성욱의 태도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이 곡은 고요하고 굵은 음색이라 너한테 잘 어울릴꺼 같아. 고민 많이 했어'

그나마 타고난 성품 덕분에 난 콧방귀를 자제할 수 있었다.
내가 고요할 리 없다. 문희의 말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
내겐 어떤 곡이냐가 중요한게 아니였다.

 

벌써부터 동아리 사람들은 학생회관 뒷뜰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가을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감상에 젖은 눈으로, 지난 공연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어느 선배누나의 상기된 얼굴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같았다
.
가을의 낭만을 운운했던 기대감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너 왜 똥씹는 표정이냐. 꾸사리 먹었냐?'
동기녀석이 염장을 긁는다. 차라리 녀석처럼 남자 3인 트리오가 속편할 듯 싶기도 했다.

 

복순이가 생긋 웃더니 내게 달려 왔다.
여느때처럼 머리를 약간 기우뚱거리며, 볼을 잔득 부풀린 채 오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1학년 수학과. 눈이 유난히도 똘망똘망하고 밉상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름만큼이나 행색도 시골에서 막 상경한 애 같았다.

 

옆에서 파트너와 우아하게 곡의 성격을 논하는 현중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보았다.

 

복순이는 동아리에 꾸준히 나왔었지만, 나와는 그다지 대화를 해본 적도 없다.
상당히 내성적인 줄 알았는데, 말하는 거 보면 엉뚱하기도 했다.

 

', 오빠와 함께 라면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헤헤헤'

난 대답조차 내키지 않았다. 억지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그리곤 스스로 선심썼다는 생각을 한거 같다.

 

'언니가 테이프 구해서 100번 이상 듣고 곡을 숙지하래요. 에헤헤헤'
도대체가 불만스러웠다
.
웃는 모습이 영 모자라 보였다.

내일부터 한달 반동안 매일 저녁 같이 연습해야 한다.
왜 이리 우울한지 모르겠다.

 

'테이프 안사주세요? 헤헤헤헤헤'

웃음소리가 너무 거북했다.
시큰둥하게 대답해 버렸다.

''

선심을 두번 쓰긴 싫었나보다.

 

복순이가 풀 죽은 표정으로 물러갔다.
나도 내 유치한 태도에 속이 쓰렸다
.
후회한들 소용없는 짓이다.

 

옆에서 깔깔거리며 흥겁게 노닥거리는 8인 합주조의 모습이 멀게만 느껴졌다.
낭만에 대한 상상을 접어야 했다.

*
다음날 복순이가 정말 테이프를 구해가지고 왔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 또 싱글벙글이다
.
미안한 마음이 들어 따뜻하게 웃어줬다
.
이왕 같이 하는거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팬플릇을 부는 복순이의 입술 모양이 영 어설퍼 보였다.
'
파이프 속으로 바람을 넣으려고 하지마. 입술과 파이프를 직각으로 해서 바람을 앞쪽으로 분다고 생각해
'
'
에헤헤 네, 정말 소리가 더 잘나네 헤헤헤헤헤헤헤헤헤
'
웃음 소리에 또 기분이 처진다
.
한숨을 내쉈다. 뒷골도 땡겼다.

 

괜히 주변으로 눈길만 돌아갔다.
현중의 파트너는 벌써부터 무대의상을 고민하고 있었다
.
현중이는 성실히 그녀의 패션 뉴스를 경청했다. 그녀는 현중의 의상까지 신경쓰는 듯 보였다
.
현중이가 좀 부담스러울 거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기분으론 안되겠다싶어, 복순이를 데리고 구내 매점으로 갔다.
그 거슬리는 웃음소리 좀 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자였다
.
음료수를 건네며 최대한 부드럽게 운을 뗐다.

'테이프 안사준거 미안해, 대신 맛있는 거 사줄께'
'
경희가 잘하라면서 사줬어요 헤헤헤헤헤'

 

동아리 친구가 테이프를 사줬다는 것은 테이프조차 사주지 않은 나의 처사가 동아리에서 회자됐다는 의미일꺼다.

철없는 남자가 체면은 더 따진다. 게다가 수치를 감당하기도 힘들다.

나의 처사에 대한 동아리 사람들의 평판을 상상하니 비참한 기분까지 들었다.
순간 짜증이 났던 거 같다.

', 그 웃음 소리좀 내지마. 그 소리만 들으면 맥이 풀려.'

 

말을 뱉고 보니 분위기가 휑했다. 더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
미안한 마음과 난처한 마음이 뒤섞였다.

 

캠퍼스를 혼자 한바퀴 돌고 다시 학생회관 뒤뜰에 가보니 복순이가 혼자 팬플릇을 불고 있었다.
다들 삼삼오오 화기애애한 가운데 혼자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왼손으로 그렇게 쥐면 힘들지 않아? 밑으로 팬플릇을 받쳐 들어'
복순이가 방긋 웃어보였다. 고쳐잡는 앙상한 팔뚝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복순이는 소리내서 웃지 않았다.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는 복순이를 보며 난 또 다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껴야했다.
곤혹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