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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호수에 젖고 #1


가을 축제의 밤, 캠퍼스의 작은 호수엔 수상무대가 설치되고, 팬플릇 공연이 펼쳐진다.
팬플릇의 선율이, 늦은 밤의 호수에 젖고 마음을 적셨을때, 난 시절의 낭만을 알았다.


*

동아리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는 집행부는 2학년의 몫이다.
회장을 비롯한 각 직책은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만 예외가 있다.
훈련부.
동아리에서 최고의 연주실력을 인정받은 남녀 각 1명으로 구성된, 동아리내에서 유일하게 전임자가 직접 지목하는 직책이다.

문희가 지목됐다.
아주 작은 체구에 마음 여린 문희는, 지목이 영 부담스러워 보였다.
사실 의외의 결정이였다.
착하기만한 문희가 동아리 사람들에 대한 훈련과 교육을 다부지게 수행낼 수 있을지 나도 걱정스러웠다.

구내매점에서 풀죽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문희가 딱해보였다.
'니가 아니면 우리 동기 중에 누가 맡겠냐. 난 오래전부터 당연히 너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뻔한 거짓말이다.
문희는 숙인 고개 그대로 반응이 없었다.

때로 무반응이 사람을 충동질하기도 한다.

문희의 손을 덥썩 잡았다.
립서비스의 혐의를 부정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문희가 놀란 눈으로 쳐다 본다.

'난, 니가 피아노반주 해줄 때만 박자를 맞출수 있어.'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며, 강력하고 끈적한 눈빛을 보냈던 거 같다.

반응은 생각이상이였다.
그녀의 건조했었던 눈동자에는 어느새 구내매점의 낡은 전등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도 순수한 우의로 받아들였으리라 나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래도 앞으론 오버 하지말자 스스로 반성했다.

분명 그 무렵 같았다.
언제나 편하기만 했던 우리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문희는 나름 귀여웠지만, 체구가 작았고 어린아이 같았다.
가끔 나이답지 않은 순진함에 놀라기도 했었다.

낯을 조금 가리는 편이였던 문희는, 유독 나에겐 스스럼없이 대해줬었다.
늘 내게 밝게 웃어주고, 나를 잘 따랐기에 동성 대하듯 편하게 어울렸었다.
착한 문희는 밥도 잘 사줬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알수없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서먹서먹해진 공기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낯설음이 지날 무렵, 난 그 어색함의 정체를 해석해냈다.
문회가 '여자'답게 행동하려 한다는 것이다. 난 당황했다.

문희의 뛰어나지 못한 미모가 가슴 아팠다.
역시 난 너무 온정적이다.
*
남자 훈련부장은 성욱이였다. 재수를 했고, 제법 뚱뚱한 체격으로 순박한 성격이였다.
사실 뒤늦게 동아리에 가입한 그의 선임을 두고 일부에선 말이 많았지만, 성실한 그는 무난히 극복해냈다.

그는 문희를 끔찍이도 위해 줬다.
가끔 그가 문희의 수행비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남자가 늘 여자를 짝사랑하다 끝나는 훈련부 커플의 오랜 [전통]은 이번에도 이어질 듯 보였다.
[전통]을 충분히 감당해내는 문희에게서, 언제부터인가 엄격한 훈련부장으로서의 품격이 느껴졌다.
그 여리던 문희가 전자오르간을 두드리며 박자를 따지고, 음색을 이야기 할땐, 내가 알던 문희가 맞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나와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만큼, 동아리에서 문희의 모습은 더욱 진중해 보이기 시작했다.

털털한 듯 보이는 성욱은, 가끔 내게 쓸쓸한 듯 묘한 눈빛을 주곤 했다.
난 그 눈빛을 열등감으로 인지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문희로 단정짓는 나 자신을 보며, 내 의식 체계엔 결함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더구나 연습에 몰두하는 문희의 열정을, 나의 냉담에 대한 탈출로 상상하는 내 자신이 스스로도 우려스러웠다.

그래도 그런 의혹을 쉽게 버리기 어려울 정도로 문희의 나에 대한 태도는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면이 있었다.
어쨌든 봄부터 시작된 그들의 팬플릇에 대한 열정은 가을이 되도록 식을 줄 몰랐다.
*
가을 공연이야말로 훈련부에겐 존재의 이유다.
선곡에서 연주편성까지 모조리 훈련부가 알아서 기획하고 결정했다.

사실 내 팬플릇 연주실력은 내세울 것이 못됐다.
딱히 팬플릇에 관심 있어, 가입한 것이 아니었기에 당연할 것이다.

1학년 가을 축제때는 감히 독주나 듀엣은 꿈도 못 꿨고, 깍두기처럼 8인 합주의 한자리를 차지했었다.
많이 서툴렀고,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민폐끼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이제 공연 배정을 앞두고, 훈련부, 실질적으로는 문희가 과연 내게 어떠한 배정을 해줄지 궁금해졌다.

가을 축제의 하일라이트를 장식하는 수상공연에서 미모의 여인과 나란히 서서 로맨스의 절정을 맛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교육학과의 어여쁜 그녀와 함께라면 충분히 멋진 그림을 소화해 낼 수 있을 듯 싶었다.

상상을 시작하자 멈추기 힘들었다.

듀엣을 한다는 것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의 호수에서 화음을 맞추듯 마음을 맞대고 서로의 눈빛에 깊이 잠겨, 영혼을 감싸는 교감의 순간까지 상상은 한없이 이어졌다.

내 마음은 벌써 가을의 절정으로 가고 있었다.

문희한테 부탁한다면 과연 들어줄까...

주는 거 없이 바라는게 많던 시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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