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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 #6 fin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느낀다.
가난하고 줄 거 없는 마음이 그 초라함마저 들킨다면 모든 것은 무너질 것이다.

 

*
일요일 아침일찍 전철을 타고 서울로 올라 갔다.
희영을 만났고, 다시 체리커플과 합류했다
.
멋진 SUV 를 배경으로 선 남자친구 옆에서 체리의 얼굴은 빛났고, 난 희영의 시선이 불편했다.

 

양평일대로 드라이브를 갔다.
그들의 차안에는 간식거리가 잔뜩 있었다
.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하는 남자친구에게 이것저것 먹여주는 체리의 모습이 영 보기 거북했다.

 

초여름의 초록빛은 길따라 시원하게 펼쳐졌지만, 왠지 처지는 기분에 난 조용히 창밖만 응시했다.
뒤좌석에 나란히 앉은 희영이 의식됐지만,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길가의 가든에서 점심을 먹었다.
난 짐짓 쾌활하게 이야기하려 했지만 역시 흥이 나지 않았다
.
컨디션이 안좋았는지 말빨이 서지 않는다.

희영도 담담한 표정으로 별말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 기분을 잘 알아봤다
.
그래서인지 마음도 편치 않았다.

 

체리가 열심히 근처의 지명과 경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체리의 남자친구가 음식값을 계산했다
.
보통때라면 '내가 계산하마' 시늉이라도 할텐데, 그냥 가만있었다.

 

강가 근처의 별장에 간다고 한다.
체리가 목소리를 높여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난 대충 흘렸다
.
어쨌든 남자친구 집안이 대단히 부자인거 같았다.

 

남자친구네 소유인지 확실친 않았지만 무슨 별장에 도착했다.
강가의 나룻터에는 꽤 좋아보이는 모터보트가 있었고, 낚시하는 곳도 있었다
.
무슨 이유에선지 별장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나룻터 근처 테이블에서 담소를 나눴다
.
강바람이 시원했다.

 

남자친구가 공손하게 낚시를 하냐고 물었다. 대충 얼버무리니 그가 차에서 낚시도구를 꺼내왔다.
사실 난 낚시에 취미없다
.
아무튼 난 그를 따라서 강으로 낚시대를 드리웠다.

체리가 보트를 타자고 제안했다.
난 혼자 낚시를 계속 하겠다고 고집했고, 희영도 별말 없었다
.
희영에게 부자연스런 모습을 보이긴 싫었지만, 내키지 않는걸 하기는 더 싫었다.

 

세명이 보트를 타고 나갔다.
보트의 성능이 상당해 보였다
.
그는 익숙한 듯 보트를 거칠게 몰았고, 이내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쾌속으로 사방을 누볐다
.
시원하게 강을 가로지르는 보트에서  그들은 강바람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
보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곁눈이 가는 건 어쩔수 없다.

 

보트를 꽤 오래탔다. 체리는 부단히 손짓을 하며 보트를 지휘했고, 희영도 긴머리를 휘날리며 즐거운 듯 느껴졌다.
문득 희영이 보트에서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
단란하게 호화 보트를 즐기는 체리커플과 멀찍이 혼자 낚시하고 있는 내모습을 그녀가 어찌 받아들일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어느덧 보트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나룻가로 접근해 왔다.

체리의 남자친구는 보트에서 내리는 체리에 이어 희영의 손도 잡아주며 안전하게 내리도록 도와줬다.
멀리서도, 그의 손을 맞잡으며 수줍어 하는 희영의 몸짓이 느껴졌다.

 

이제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희영을 대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늘 내 기분을 잘 느끼는 그녀다
.
이대로라면 내 초라한 마음을 볼 것이고, 난 한없이 무너져버릴 것이다
.
그녀는 내게 위로를 시도할지도 모르겠다.

 

결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위로다.

 


여자친구 면전에서 누군가에게 비참하게 얻어터지고나서 여자친구를 당당히 쳐다볼 수 있을까.
난 할 수 있다.

 

가슴 가득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주문을 외우듯, 마음을 다잡았다
.
[
난 결코 위축되지 않는다. 세상 앞에 난 언제나 당당했고, 충만한 내 삶에 대한 신념은 확고하다
.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 못지 않게 세상 전부를 사랑 하며, 평범한 네 앞에 난 한없이 넉넉하다]

짧은 순간, 내 가슴에선 온 세상을 다 담을 수 있는 풍요로운 에너지가 차올랐다.

 

이제 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 아주 좋은데? 앞으로 이런 데 자주 와야 겠다.'

 

내 눈빛엔 여유와 자신감이 가득했음를 확신했다.

 

'...'
분명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젖었다. 눈빛도 역시...

내 자기기만은 성공했나 보다.

 

그녀를 뒤따라온 체리커플로 시선을 옮겼다.
희영의 시선은 내게 고정돼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에너지의 유효시간을 충전시켜준 듯했다.

 

'~ 이런 곳도 다 있네요. 정말 좋은데요, 체리야, 주말 데이트가 항상 즐겁겠어'

난 결코 초라하지 않았고, 그들의 시선을 즐겼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희영은 내 어깨에 기댔다.

난 아까 희영의 젖었던 목소리와 눈빛의 의미를 생각했다.

아마 나룻터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 나를 기대했을 거다.
동정했을지, 실망했을지는 분명치 않다
.
어쩌면 둘 다였을 듯 하다.

 

그런 기대감이 어긋나면 사람은 감동하던가... 난 잘 모르겠다.

그녀는 내게 깊게 기대고 있었지만, 난 외로움을 느꼈다.

그녀 앞에서 항상 자기기만을 연출하며 살 수는 없다.
마음이 가난한 내 자신을 과장과 연출로 위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녀 앞에서 난 진솔했던 적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워졌다.

대학시절, 누군가에게 진솔했던 적이 있냐고 물었던 옛 연인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면 난 누군가를 진정 마음에 담아본적이 없었던 거 같다.


서울에 도착해, 체리커플과 헤어져 희영과 단둘이 남았다.
달빛따라 제법 한참을 걸었다.

나 혼자 상념에 빠져 있었나 보다.
그녀가 문득 다시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아까 보트에서 유월씨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했었어. 미안해'

 

난 말없이 그녀를 안아줬다.
그녀의 기대에 부합되는 표정을 만들어내기엔... 에너지를 충전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를 온전히 안았지만, 외로움은 여전했다.

 

이름을 담을 수 없는 그녀, 과연 내 마음엔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