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난 감히 바람의 관심까진 받지 못했다. 나를 키운 건 수치심이였다.
*
짜증을 내도, 화를 내도, 무시를 해도 한결 같은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은 잠시 뿐이였다.
난 복순이를 존중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연주 연습을 같이 하다 적당한 조언을 해주고, 간혹 어색한 관심 표현을 [수행]하는 것
그 정도로 난 내 할 바를 충분히 하고 있다고 자족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은 여전했고, 못마땅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복순이의 뽀글뽀글한 짧은 머리가 영 마음에 안들었다.
헐렁한 청바지도 보기 싫었고, 늘 들고 다니는 큼직한 가방도 우스웠다.
결정적으로, 복순이와 둘이 연주를 하다가도 동기녀석들의 시선이 의식되면 창피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느낌은 나 스스로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녁 연습을 마치면 훈련부 앞에서 레슨을 받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다.
한동안 문희는 내게 노골적인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애꿎은 복순이만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박자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거 같아'
'호홉을 생각해야지'
잔소리를 듣던 복순이가 슬쩍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 미소였다. 알수 없는 여운이 되었다.
어찌 보면 생각없는 애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했다.
*
여느때처럼 팬플릇을 챙겨들고 학생회관 뒷뜰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연습하는 사람이 몇명 없었다.
현중이가 복순이의 연주를 봐주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지켜봤다.
복순이는 짧게 몇소절을 하다 수줍게 중단했다.
현중이가 자상한 손길로 자세를 교정해 준다.
복순이는 영 불편한 듯 보였다.
마치 그런 따뜻한 친절은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듯...
그럼에도 현중이의 표정은 더없이 넉넉했다.
거기서 난 [선배]의 마음을 봤다.
난 누구에게도 선배가 되어준 적이 없었다.
싸나이 운운하며 남자후배를 부렸던 것도 지극히 유치하게 느껴졌다.
생각은 더욱 비약됐다.
난 진중하게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그릇도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숱한 스캔들을 몰고다니는 최고 얼짱의 파트너로 현중이가 선택된 것도 납득이 갔다.
초라한 눈으로 다시 그들을 바라보는데, 복순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복순이가 벌떡 일어나 밝게 인사했다.
인사 받기도 민망했다.
난 서둘러 민망한 기분을 수습하고 짐짓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마음을 보이긴 싫었나 보다.
'어제 문희가 얘기한 당김음이 뭔지 알아들었어?'
복순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일명 싱커페이션이라고, 리듬에 엇박자를 주는 거잖아. 우리 곡에 여러번 나오는 건데, 우린 그런 건커녕 기본 박자도 못맞추고 있으니 어쩌냐.'
'죄송해요'
'이런 것도 좀 알아보고... 같이 더 노력해야 겠다'
'네. 죄송해요'
대답하는 복순이의 얼굴엔 이상하게 생기가 도는 거 같았다.
*
다음날 현중이와 점심을 먹었다.
'복순이 걔, 참 착하더라'
'...?'
기분이 착잡해졌다.
'어제 너 오기전에 얘기 좀 했었는데, 너 보여준다고 당김음에 대해 깨알같이 정리해 와서, 나한테 내용을 확인해 달라고 하더라구.
근데 너 무안할까봐 내색안한 것도 이쁜데... ...너 없을 때 물어봤거든, 왜 노트 안보여줬냐구,
걔 대답이, 너가 그런것도 알아보는 성의를 보여서 좋았단다. 이 얘기 너한테 해주고 싶었다. 너가 잘해주고 있는 거 잘 알고는 있는데, 그냥...'
난 현중이한테까지 어줍잖은 자존심을 챙기진 않았다.
'니가 보기에도 내가 복순이를 너무 막 대한거 같냐?'
'막 대한다기 보단... 글쎄.. 쫌...'
감동을 하고 수치심을 느낀다고 사람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
적어도 난 그랬었다.
복순이한테 더 잘해야 겠다고 다시금 마음을 잡아 보지만 뜻대로 될 지 자신이 안섰다.
그래도 염치만은 갖기로 굳게 의지를 다졌다.
*
근래 들어 문희가 많이 예민해 졌다.
특히 8인 합주조가 문제였다. 연습에 빠지는 사람도 몇 있었고, 연습시간에도 상당히 어수선했다.
당연히 연습 성과가 지지부진했다.
관심 있던 교육학과 여후배 역시 공연엔 별 열의가 없는 듯 보였다.
그 후배와의 로맨스는 애초부터 가당치도 않은 꿈이였다.
나 역시 성실치 못했던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게 짜증 한번 내지 않은 문희가 고마웠기도 했고, 미안했기도 했다.
점차 신경질적이고 민감해져 가는 문희에게도 염치가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했다.
내가 문희에게 수그리고 겸손해 질수록 문희의 나에 대한 잔소리는 급격히 강도를 더해갔다.
처음엔 복순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던 지적사항도, 이젠 직설이고 노골적으로 내게 향해졌다.
'따안 따 따. 여기, 여기서 자꾸 틀리잖아, 왜 자꾸 호홉을 끊어?'
'아직도 그대로잖아. 휴~. 이부분 연습해서 다시 와.'
난 익숙치 않은 문희의 꾸사리를 기꺼이 감당했지만, 문득 늘 꾸사리의 현장에 같이 있는, 복순이의 시선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분명 우리의 연주가 여전히 발전이 없는 건 내 탓이다.
원래 실력도 시원찮았지만 그다지 성실하지도 못했으니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원망하는 눈길 한번 주지 없는 복순이의 심정이 이제야 신경쓰였다.
어쩌면 비로소 복순이를 파트너로 인정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진작에 하지 못해 미안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느끼며, 어쩌면 나도 넉넉한 선배가 되어 줄수 있을 거 같다는 기대를 가져 본다.
*
연습이 끝나고 몇몇 동기들과 뒤풀이를 했다. 오랜만의 술자리다.
술집의 공기가 제법 무거웠다.
대체로 연습성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동기녀석하나가 음색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훈련부장 성욱이 그 말을 받으면서, 별 어려운 전문용어가 마구 튀어나왔다.
박학다식에 달변이기까지한 나도, 입이 근질거렸나 보다. 일장 연설을 했다.
'난 그런 어려운 말 잘 몰라, 그러나 음색이라면 결국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이 반영되는 거야.
우울한 음색을 싣고 싶다면 진정 우울한 마음을 담아서 연주해봐, 진정으로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참 괜찮은 말이었다.
'심지어 음색엔 현재의 기분도 드러나잖아. 기분 나쁠때 음색이 좋을 수 있겠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난 한걸음 더 나갔다.
'노래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그 노래의 정신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성욱이가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 진실된 눈빛에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내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음을 난 알고 있다.
내가 그래본적 있던가...
방금 한말이 누군가에게서 줏어들은 소리는 아니다.
사람이란 꼭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만 하는 건 아니다.
할 수도 없는 것을 쉽게 지껄이며, 복순이에겐 모질기만 했던 자신이 한심스레 느껴졌다.
방금 한 말, 복순이에게도 이야기 해주고 실천하리라 다짐했다.
...우리가 어느별에서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
근데 노래의 마음이 너무 부담 스럽긴 하다. 역시 자신이 안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