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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호수에 젖고 #3


미당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난 감히 바람의 관심까진 받지 못했다. 나를 키운 건 수치심이였다.
*
짜증을 내도, 화를 내도, 무시를 해도 한결 같은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은 잠시 뿐이였다.
난 복순이를 존중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연주 연습을 같이 하다 적당한 조언을 해주고, 간혹 어색한 관심 표현을 [수행]하는 것
그 정도로 난 내 할 바를 충분히 하고 있다고 자족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은 여전했고, 못마땅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복순이의 뽀글뽀글한 짧은 머리가 영 마음에 안들었다.
헐렁한 청바지도 보기 싫었고, 늘 들고 다니는 큼직한 가방도 우스웠다
.
 

결정적으로, 복순이와 둘이 연주를 하다가도 동기녀석들의 시선이 의식되면 창피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느낌은 나 스스로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녁 연습을 마치면 훈련부 앞에서 레슨을 받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다.
한동안 문희는 내게 노골적인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
애꿎은 복순이만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박자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거 같아'
'
호홉을 생각해야지'

 

잔소리를 듣던 복순이가 슬쩍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 미소였다. 알수 없는 여운이 되었다
.
어찌 보면 생각없는 애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했다
.
*
여느때처럼 팬플릇을 챙겨들고 학생회관 뒷뜰로 향했다
.
아직 이른 시간인지 연습하는 사람이 몇명 없었다
.
현중이가 복순이의 연주를 봐주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지켜봤다
.
 

복순이는 짧게 몇소절을 하다 수줍게 중단했다.
현중이가 자상한 손길로 자세를 교정해 준다
.
복순이는 영 불편한 듯 보였다.


마치 그런 따뜻한 친절은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듯...
그럼에도 현중이의 표정은 더없이 넉넉했다.

 

거기서 난 [선배]의 마음을 봤다.
난 누구에게도 선배가 되어준 적이 없었다
.
싸나이 운운하며 남자후배를 부렸던 것도 지극히 유치하게 느껴졌다.

생각은 더욱 비약됐다.
난 진중하게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그릇도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
숱한 스캔들을 몰고다니는 최고 얼짱의 파트너로 현중이가 선택된 것도 납득이 갔다.

 

초라한 눈으로 다시 그들을 바라보는데, 복순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복순이가 벌떡 일어나 밝게 인사했다.

인사 받기도 민망했다.
난 서둘러 민망한 기분을 수습하고 짐짓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마음을 보이긴 싫었나 보다.

 

'어제 문희가 얘기한 당김음이 뭔지 알아들었어?'
복순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
'
일명 싱커페이션이라고, 리듬에 엇박자를 주는 거잖아.  우리 곡에 여러번 나오는 건데, 우린 그런 건커녕 기본 박자도 못맞추고 있으니 어쩌냐
.'
'
죄송해요
'
'
이런 것도 좀 알아보고... 같이 더 노력해야 겠다
'
'
. 죄송해요
'
대답하는 복순이의 얼굴엔 이상하게 생기가 도는 거 같았다
.
*
다음날 현중이와 점심을 먹었다.

'복순이 걔, 참 착하더라'
'...?'
기분이 착잡해졌다.

 

'어제 너 오기전에 얘기 좀 했었는데, 너 보여준다고 당김음에 대해 깨알같이 정리해 와서, 나한테 내용을 확인해 달라고 하더라구.

 근데 너 무안할까봐 내색안한 것도 이쁜데... ...너 없을 때 물어봤거든, 왜 노트 안보여줬냐구,

 걔 대답이, 너가 그런것도 알아보는 성의를 보여서 좋았단다. 이 얘기 너한테 해주고 싶었다. 너가 잘해주고 있는 거 잘 알고는 있는데, 그냥...'

 

난 현중이한테까지 어줍잖은 자존심을 챙기진 않았다.
'
니가 보기에도 내가 복순이를 너무 막 대한거 같냐
?'
'
막 대한다기 보단... 글쎄.. ...'

 

감동을 하고 수치심을 느낀다고 사람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
적어도 난 그랬었다.

복순이한테 더 잘해야 겠다고 다시금 마음을 잡아 보지만 뜻대로 될 지 자신이 안섰다.
그래도 염치만은 갖기로 굳게 의지를 다졌다
.
*
근래 들어 문희가 많이 예민해 졌다
.
특히 8인 합주조가 문제였다. 연습에 빠지는 사람도 몇 있었고, 연습시간에도 상당히 어수선했다
.
당연히 연습 성과가 지지부진했다
.
관심 있던 교육학과 여후배 역시 공연엔 별 열의가 없는 듯 보였다
.
그 후배와의 로맨스는 애초부터 가당치도 않은 꿈이였다.

 

나 역시 성실치 못했던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게 짜증 한번 내지 않은 문희가 고마웠기도 했고, 미안했기도 했다
.
점차 신경질적이고 민감해져 가는 문희에게도 염치가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했다.
내가 문희에게 수그리고 겸손해 질수록 문희의 나에 대한 잔소리는 급격히 강도를 더해갔다
.
처음엔 복순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던 지적사항도, 이젠 직설이고 노골적으로 내게 향해졌다.

 

'따안 따 따. 여기, 여기서 자꾸 틀리잖아, 왜 자꾸 호홉을 끊어?'
'
아직도 그대로잖아. ~. 이부분 연습해서 다시 와.'

난 익숙치 않은 문희의 꾸사리를 기꺼이 감당했지만, 문득 늘 꾸사리의 현장에 같이 있는, 복순이의 시선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분명 우리의 연주가 여전히 발전이 없는 건 내 탓이다
.
원래 실력도 시원찮았지만 그다지 성실하지도 못했으니 당연할 것이다
.
그런데도 원망하는 눈길 한번 주지 없는 복순이의 심정이 이제야 신경쓰였다.

 

어쩌면 비로소 복순이를 파트너로 인정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진작에 하지 못해 미안했다
.
하지만 이런 마음을 느끼며어쩌면 나도 넉넉한 선배가 되어 줄수 있을 거 같다는 기대를 가져 본다
.
*
연습이 끝나고 몇몇 동기들과 뒤풀이를 했다. 오랜만의 술자리다
.
술집의 공기가 제법 무거웠다
.
대체로 연습성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동기녀석하나가 음색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훈련부장 성욱이 그 말을 받으면서, 별 어려운 전문용어가 마구 튀어나왔다.
박학다식에 달변이기까지한 나도, 입이 근질거렸나 보다. 일장 연설을 했다
.

'
난 그런 어려운 말 잘 몰라, 그러나 음색이라면 결국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이 반영되는 거야.

 우울한 음색을 싣고 싶다면 진정 우울한 마음을 담아서 연주해봐, 진정으로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참 괜찮은 말이었다
.
'
심지어 음색엔 현재의 기분도 드러나잖아. 기분 나쁠때 음색이 좋을 수 있겠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난 한걸음 더 나갔다.
'
노래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그 노래의 정신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성욱이가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 진실된 눈빛에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내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음을 난 알고 있다
.
내가 그래본적 있던가
...
방금 한말이 누군가에게서 줏어들은 소리는 아니다
.
사람이란 꼭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만 하는 건 아니다.

 

할 수도 없는 것을 쉽게 지껄이며, 복순이에겐 모질기만 했던 자신이 한심스레 느껴졌다.
방금 한 말, 복순이에게도 이야기 해주고 실천하리라 다짐했다.


...우리가 어느별에서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

 

근데 노래의 마음이 너무 부담 스럽긴 하다. 역시 자신이 안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