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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호수에 젖고 #5 fin


닿을 수 없는 꿈을 그리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했었다. 꿈이란 늘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열고 주변을 보면 이미 나에게 맞닿아 있는 수많은 꿈들을 찾아 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허설은 무난하게 끝났다.
문희의 표정을 봐도 썩 못하지는 않은 듯 싶다
.
일부는 추가 연습을 위해 남았고 대부분은 컨디션 조절을 위해 귀가했다
.
우리는 귀가하기로 했다
.
한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복순이를 보니 미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생각났다
.
맛있는거 사주겠다고 했었는데 여태 못사준게 부끄러웠다
.
미용실을 다녀와야한다기에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
*
돈가스집에 갔다.

난 손을 뻗어 복순이의 양념장에 소스도 뿌려주고 이것저것 챙겨줬다.
이런 모습이 나 스스로도 익숙치 않았다
.
난 그다지 매너 있는 스타일도 못됐던 거 같다.

 

복순이가 평소보다 훨씬 활달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정색을 하고 말했다.
'
복순아, 넌 너가 많이 이쁜거, 알고 있니
,
 
이번에 깨달은 건데자신을 소중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이쁘지 않나 싶다.'

 

내가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한거 같다.

활기 넘치던 복순이의 얼굴이 빨개졌고, 말이 없어졌다.
비로소 가을의 기품이 느껴진다
.
*

오후가 순식간에 지나간거 같다.
어느새 어둠이 확연해지자 설레임과 흥분이 찾아왔다.

 

며칠전에 벌써 봤던 공연 팜플렛이였지만, 다시 보니 또 새로웠다.
나의 무대는 거의 마지막 쯤에 배치돼 있었다.

 

첫 무대는 졸업을 앞둔 선배누나의 독주다.
그 선배누나는 합동 연습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
어제 리허설때 잠깐 눈인사를 했을 뿐, 이번 가을 들어서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

늘 보던 호수였지만 오늘따라 생명이 느껴지는 듯 했다.
가을 밤의 호수는 그 고요함으로, 모여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안아줬고
,
차분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밤의 호수에 고여 포근함을 더하는 듯 했다.

 

사람과 호수의 소통을 깨고 수상무대의 사회자가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선배의 독주

이 곡만큼은 무대 뒤편에서 들을 수 없었다.
정식으로 듣고 싶었다
.
나의 파트너를 두고 갈 수 없어, 복순이와 함께 수상무대가 훤히 보이는 앞쪽으로 갔다.

공연감독을 맡은 선배형이 이상한 눈으로 봤지만, 우린 대기 장소를 이탈했다.

 

이은미의 '기억속으로'
일년전 선배누나가 불렀던 노래를 분명히 기억한다.

그 시절 느꼈던 애잔함이 다시 살아오는 듯 했다.
그때의 노래가 이제 팬플릇의 선율이 되어, 고요한 호수에 가득 잠겼다.

 

일년전, 선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이제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공연에서 선배는 숱한 추억들을 쓸쓸히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선배의 추억 맨 구석 언저리에는 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초라하긴 했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때 둘이 함께 했던 기억은, 나에겐 미숙한 상처로 남았었다
.
 
슬쩍 옆의 복순이를 쳐다봤다
.
복순이는 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무대로의 시선을 풀지 않았다
.
수줍고 어색한 표정이였다
.
내가 선배에게 느꼈던 동경과 비슷한 것을, 복순이도 느끼고 있을지 모를일이다.

우린 파트너다.

*
이제 무대로 가야했다.

난 긴장감을 스스로 잘 관리하는 편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요원의 신호에 따라 무대로 향했다.

 

늘 미소를 잃지 않던 복순이였다.
한달 반동안 함께 했던 나의 파트너 복순이에게서 긴장이 느껴졌다.

말없이 넉넉한 미소를 보내줬다.
반응하는 복순이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신뢰를 봤다.

이젠 신뢰 받을 자격이 내게도 있을 것이다.
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막상 전주가 시작되자 나도 급격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새 차분해진 복순이와 마주 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
서로 의지한다는 기분을 실감했다
.

조명을 받은 호수의 수면 위로 바람따라 물결이 주름되어 흘렀다
.
호수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
가을밤의 설레임이 담긴 우리의 노래를 시작했다.

 

상대를 인정했을 때 나도 그에게 의미가 될 것이고 비로소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눈빛에 기대어 서로를 신뢰하면서, 이미 난 가을의 꿈에 닿아있음을 알았다.

함께 하는 연주를 통해 난 복순이가 나를 포용했었음을 느꼈다.
그 포용이 아니였다면 난 마음을 열수 없었으리라

 

열린마음으로 꿈을 보는 것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일 것이다.

 

마지막 합주부분이 끝나고. 반주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을 때, 우리는 팬플릇을 든 그대로 서로를 바라봤다.
난 나직하게 말했다.

'고마워'

차마 [너가 순수하고 착하고 게다가 이쁘지 않았다면, 난 아마 모든걸 망쳤을 거야]란 말은 할 수 없었다.
순수할수 있다는 거 때론 속이 깊어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말없이 웃기만 하는 복순이의 차분한 표정에서, 혹 내 마음을 알아본 건 아닐까하는 부끄러움을 느꼈드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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