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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2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미진이 내게 사내메신저를 날렸다. 흔치 않은 일이다.
딱히 별 화제가 없음에도 엄한 이야기만 자꾸 늘어놨다.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다.

 

[어제 어땠어?] 
[그분은 어떠셨대요?]
 

미진은 빛과 같은 속도로 되물었다.
극 존칭이 상당히 거슬렸다.
별 마땅찮은 녀석이 받기엔 너무 과분한 대접 같았다.

 

[어제 일이 있어서 통화못했어, 오늘 꼭 할께]

 

미진의 입장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왜 호감이 가는지는 묻고 싶었다.

 

[그 친구 괜찮은가봐.]
[과묵하시고, 아시는 것도 많고, 남자다우신거 같아요...]

 

입안에서 쓴맛이 돌았다.
남자답다는 말은 참 쉬운 듯 어려운 말이다.

 

[어제 커피샾 나와서 뭐 했어?]
[한강 좀 걷다 왔어요]

 

역시 돈 안드는 것만 하는 녀석이다.

 

서로 명함을 교환했다고 한다.
아마 녀석은 한 일주일 쯤있다가 무신경한 듯 전화 한 통 때릴 것이다.
왠지 들떠있는 미진의 모습이 찝집했다.
 

밤에 녀석과 통화했다.

 
'그냥 내 스타일은 아닌데, 요즘 딱히 만나는 여자도 없고... 한번 생각해 볼께. 암튼 주선해 줘서 고마워'
 

녀석은 마음에 든다는 말을 저런식으로 표현한다.

 

다음날, 또다시 미진이 메신저를 보내왔다.
또다시 묻고 싶은 말을 바로 못하고, 엉뚱한 화제를 늘어놓는 모습에서 더 이상 예전의 털털했던 성품은 찾을 수가 없었다.
통화결과에 대한 코멘트를 놓고 제법 고민이 됐다.

이제와 내가 고추가루 뿌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먹힐 거 같지도 않았다.

 

[미진씨가 이쁘고 착하다고 하더라구]

 

어쩌면 나의 우려는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걸수도 있다.
여자는 결코 남자가 기대하는 것 만큼 연약하지 않으며, 남자 역시 그닥 강하지 못함을 살면서 많이 느껴오지 않았던가...
더구나 동창녀석은 겉멋만 들었지 모질지는 못한 녀석이다.
나의 개입은 의미없다고 결론내렸다.

 

당시에는 나 역시 막 성공적인 사내커플로 안착하던 시기였기에, 그들에게 관심 갖기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사내커플인 것을 잘 알고 있는 미진은 역설적으로 부담없이 메신저를 날리곤 했다.
가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커플을 대하는 모습이 어색해서 웃겼다는 식의 이야기도 해줬고,
나른한 오후가 되면 간혹 주절이 주절이 동창과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그 둘은 통화도 제법 자주하고,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꼭 만나는 듯 했다.  
어쨌든 만남은 이어질 듯했다.
옷차림도 화사해지고, 얼굴색도 고와지는 미진을 보며, 좋은 시절이 왔기를 바랬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갔다.
고교 동창 몇명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난 준표에게 이미 다 알고 있는 미진과의 근황을 인사삼아 물었다.
대충 얼버무리는 꼴이 다른 친구들에게 소문나지 않길 바라는 눈치다.
문득 미진의 얼굴이 생각나 씁쓸했다.
어차피 미진이 자초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
당시 구매팀은 1층에 있었고, 경리팀은 4층에 있었다.
구매대금 결제를 위해 구매팀은 경리팀에 자금요청서를 제출하고 경리팀은 승인된 예금 인출증을 구매팀에게 주는데,
미진은 늘 4층까지 올라와서 받아갔었다.
간혹 내가 은행가는 시간이 맞으면 나가는 길에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경리팀에 와서 수령하는 것이 원칙이였다.

메신저를 자주 교환하고 친밀감이 더해지던 무렵부터 미진은 당연하다는 듯, 내가 가져다 주는 것을 받기만 했다.
더 이상 서류 수령을 목적으로 4층까지 올라오려 하지 않았다.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였다. 그래도 타부서와의 형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색하고 한마디 했다.

 

'경리팀 창구에서 수령하는 것이 원칙이야, 가끔 편의는 봐주겠지만, 원칙이란 거 분명히 알아둬'

 

나름 기분 상하지 않도록 짧게 말했으나 이후 서먹서먹해지는 분위기는 어쩔수 없었다.
아무튼 잔소리 덕에 열심히 서류 받으러 올라오긴 했다.
더 이상 오지 않는 미진의 메신저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
[누군가에게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외로운 일인가봐요.]

 
뜬금없이 날라온 미진의 메세지. 난 마침 급하게 은행을 나가야 해서 답변하지 못했다.
은행으로 달리면서도 머리속에서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은행에 가서 서류를 주고 받으면서도 미진의 메세지에 대한 답변을 생각했다.
준표녀석에게 전화를 해볼까도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진지하게 답할 것인가, 농담처럼 넘겨줄 것인가
사무실에 도착할때까지도 유쾌한 농담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대를 버려, 무조건 길이 생길거라 난 확신해.]

 

메세지를 날리자마자 후회가 됐다. 괜한 말 한듯 싶었다.
미진은 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후 미진과 마주쳐도 내색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메세지도 없었다.

미진의 얼굴은 무심해 보일 뿐, 특별히 어두운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
고교동창과 또 술자리를 가졌다.
난 연애하느라 바빴지만, 궁금한 것이 있어 귀찮아도 참석했다.

좌중의 시선을 받으며 준표가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앞까지 가서 기다렸거든?

 근데 자기도 어쩔수 없는 스케즐이라는 것이 있으니, 앞으론 올꺼면 미리 연락하고 오라는 거야.

 앞으론 연락할 일 없을거라고 하고, 그냥 와버렸다.'

 

어깨를 으쓱하는 준표의 목소리는 컸지만, 눈에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저말이 사실일수도 있을수 것이다.
그리고 나도 예전에 저런 모습에서 자기만족감을 느꼈던 적이 분명 있었던 거 같다.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말하는 녀석에게서도 초라함이 느껴졌다.

 

대학원 다니는 친구가 자신의 동기중에 정말 괜찮은 애가 있다고 했다.
준표가 소개팅 한 건을 또 접수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