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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1


고교 동창이 소개팅을 요구했다.
그 정도면 인물이 빠지는 거 같지는 않은데, 졸업하도록 연애한번 제대로 못 해본 녀석이다.
그만큼 순진한 면이 있다.

 

마침 구매팀 여직원이 생각났다.
여직원 역시 연애경험이 그다지 없어보여 서로 비슷할 거 같기도 했다.
성격이 털털하고 괜찮은 여자다.
*
퇴근 후 여직원과 함께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늘 수수하던 여직원이 오늘은 제법 꾸미고 왔다.
 

'남자다운 사람이 좋다고 했었는데, 어떤 게 남자다운 거야?'
'글쎄요. 시원시원하고 소심하지 않고...'

 

소심하다는 말은 좀 무책임한 표현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심이라는 잣대를 굳이 들이댄다면,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동창은 역 앞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첫대면을 길거리에서 하게 한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딱히 근처지리도 모르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인사해 이쪽은 미진씨, 이쪽은 준표'
 

녀석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만 한번 까딱 할뿐, 그 쉬운 미소한방 만들질 않았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일단 커피샾을 찾아 이동했다.
 

동창녀석이 나한테 바짝 붙어 별 시시콜콜한 질문을 했다.
다른 친구 안부, 직장이야기 등을 묻고 이야기하며 뒤따라오는 여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혹시 이녀석이 한눈에 여직원이 맘에 안들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슬쩍 뒤를 보니 미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따라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녀석은 발전이 없었다아직도 지가 왕자인줄 아는 거 같다.
기본 매너도 모르는 녀석때문에 당황스러웠고, 미진에게 미안했다.
잘해주고 싶은 회사직원인데 면목이 안섰다.

 

커피샾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무뚜뚝한 녀석의 표정에 한숨이 나왔다.

아직도 구시대적인 컨셉을 못버리고 있는 녀석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앞으로도 연애하기 힘들 거 같다.

 

조심스레 미진의 안색을 살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의 털털한 인상은 간데 없고 다소곳한 느낌마저 드는 태도는, 혹 녀석의 컨셉이 어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을 품게 했다.
 

난 양측의 기본 신상에 대해 짧게 소개해줬다.
녀석의 신상을 설명할 때, 미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소개가 끝나자 녀석이 또다시 내게 우리만의 화제를 이야기했다.
 

'지난 주에 전철에서 종필이 만났다. 이제야 2학년 복학이란다.'
 

뒤통수를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난 녀석의 화제를 무시하고 미진에게 질문했다.
 

'최근에 영화본거 있어?'
'아니요 영화를 좋아하긴 하는데 요즘 통 못봤어요'
 

도무지 이 녀석은 반응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말을 무시한 내가 기분 나쁜지. 인상을 쓰며 창밖을 본다.
 

난 미진과 재밌게 봤었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미진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고, 조신한 말투가 낯설었다.
내 체면을 생각해주는 건지, 녀석이 마음에 드는 건지 분명치 않았다.

 

미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다급하게 물었다.

 
', 맘에 들어, 안들어?'
'그냥 뭐..'

 
입술을 앙다물며 인심쓴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두차례 짧게 끄덕인다.
 

속에선 열불이 일었지만,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 그럼 말 좀해. 이게 뭐야, 내 입장 생각해서 좀 잘해줘라'
'내가 알아서 할께. 여자 한두번 만나보냐.'
 

욱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을 받았다.

 
'그래, 그래도 아무튼 말 좀 해줘라. 부탁이다.'
 

또 다시 인심쓴다는 저 표정... 속이 뒤집어 졌다.

미진이 오자, 녀석이 상체를 앞으로 끌어 당기며 말했다.
말하는 어깨가 떡 벌어진 느낌이다.

 
'혹시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때 투표하셨어요?'
 

나도 모르고 고개가 팍 꺽였다. 머리가 아팠다.
근데 오늘따라 미진이 새로운 모습을 자꾸 보여줬다.
미진이 정치에 이렇게 관심이 있었는지 몰랐다.
미진의 적극적인 응대에 녀석은 흥이 났는지, 점차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화제는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태동과 프랑스 대통령제의 특징, 미국식 의회제도를 아우르고 있었다.
열변을 토하다 문득 나의 시선을 접한 녀석은, [이 정도면 만족하냐]는듯한 눈빛이였다.
실제로 만족감은 녀석의 표정에 가득했다
 

이제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와 종속이론으로 이어졌다.
미진은 열심히 들었다. 진짜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녀석은 워낙 그쪽 방면의 책을 많이 읽긴 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난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했다.

 

미진이 밝게 웃으며 한마디 한다.

 
'커피값 계산하고 가실꺼죠?'
 

벌써부터 녀석을 챙기는 미진에게서 배신감을 느꼈다.
도대체 아직도 저런 컨셉이 어필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난 학생시절에 용도 폐기했던 컨셉이다.
한때 여자들 앞에서 어깨에 힘주고, 혼자만의 화제로 침을 마구 튀기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을 보며, 어쩌면 나도 여전히 내 멋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밤늦게 녀석에게 전화해볼까 하다가 기분 나빠서 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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