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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 #5



'희영'
내겐 담기 힘든 이름이였다. 선천적 결함탓이다.

 

고교시절, 음악시간에 실기 테스트로 [이히 리베 디히] 를 불러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나름 멋드러지게 부르는데,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박장 대소했다. 그 땐 이유를 몰랐다.

 

어학연수를 가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He를 발음해도 사람들은 She 로 알아들었다
.
[
이시 리베 디시]

[] 발음이 안됐다. 미국에선 He 를 발음할때 []로 발음하며 대충 소통은 할 수 있었다.

 

늘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부담스러웠다.
이름을 담을 수 없는 나의 비애를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시영씨'
어렵게 불러보아도, 변함없이 우아한 미소로 바라보는 모습에 감동했드랬다.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가급적 회사에서는 서로 대화를 삼가했다.
덕분에 그녀와 교환하는 눈빛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
역시 말보다 눈빛이야말로 마음을 전달하는데 탁월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특히 그녀는 말없이도 내 기분을 잘 파악하는 듯 했다.
가끔 메신저로 내 컨디션을 지적해주는 마음이 훈훈했다.

*
내게 변화가 생겼다.
머리에 젤이라는 것을 바르게 되었고, 와이셔츠에 구김이 보이면 어머니에게 불평을 했다
.
매주 수요일 평상복을 입는 날이면 아침에 거울을 몇번씩이나 보게 됐고, 출근길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돌이켜 보면, 난 마음을 억제하고 닫는데 익숙했던 거 같다.
그러나 마음이 흐르는대로 따르는 기쁨을 새롭게 배웠다
.
마음을 열고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닐것이다.

 

전에는 신경쓰지 않았는데, 식당에서 쫄면이나 덮밥류에 깨소금이 많이 뿌려져 있으면 못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싫어해서다.

미모하고 동떨어진 줄 알았던 배두나가 볼수록 이뻐보였다.
그녀가 이쁘다고 했다.

무슨 음반 메이커 인줄 알았던 'R&B' 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알 켈리의 노래는 더없이 깊게 느껴졌다.
그녀가 좋다고 했다.

 

처음의 낯설음만 극복한다면, 가치와 생각을 공유하고 상대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금방인 거 같다.

*
그녀의 친구, 체리
그녀는 친구를 그렇게 불렀다.
유치한 듯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세련되고 친근감이 넘치는 거 같다
.
체리는 그녀 못지 않게 늘씬하고 미모가 출중했는데, 둘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같았다.

 

희영과 있다보면 당시 막 보급이 한창이던 휴대폰이 자주 울렸다.
대부분 체리였다. 체리는 그녀와 자주 통화를 했고, 간혹 우리의 술자리나 식사자리에도 합류했다
.
체리도 나의 이야기을 즐거워 하는 듯 했고, 세명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다.


희영과 단둘이 있을 땐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들이 체리를 통해서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둘의 화제는 대부분이 패션에 대한 이야기였고, 간혹 영화나 음악이야기도 나눴다.
둘은 만나면, 일단 서로에 대한 찬미부터 시작했다.

 

'어머, 너 그렇게 블라우스에 받쳐입으니 너무 잘 어울린다.'
'
호호 브릿지 다시 한거야? 고민하더니 기어이 했구나~무 예쁘다.'

 

결코 익숙치 않은 그들의 화제가 신선하고 흥미있기도 했지만, 자꾸 듣자니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느낌도 들었다.
그들은 저축을 거의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월급날이나 보너스지급일은 그네들의 쇼핑스케즐이였다.

 

당시 난 박봉임에도 급여의 60%~70%이상을 저축했다.
자동차와 휴대폰이 없던 것이 전혀 부끄럽지도 않았고 계획도 없었다.

 

그녀가 이런 나를 어찌 생각할지 신경쓰이는 나자신을 깨닫고, 잠깐 초라함을 느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다짐했다
.
나 자신은 그녀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생각하기 싫었다.

 

우린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고, 가치가 다르다
각기 다른 가치를 존중해 주는 성숙함 따위를 고민했던 건 아닌거 같다.

단지 그녀와 같이 있으면 좋았고, 떨어져 있으면 생각났다.

 

체리의 남자친구를 소개받았다.
늘 그렇듯 이런 자리에서 남자들은 서로 조심한다
.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정중했다.

 

호남형이고, 큰 키에 아주 마른 체형으로, 작은 눈이 왠지 소심해 보였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좀 특이했다
.
체구에 비해 작은 자켓이 몸에 딱 달라붙는 느낌이였는데, 내겐 낯설게 보였다.

 

그에게는 신형 SUV 가 있었다.
체리 커플은 주말마다 교외로 드라이브를 하는 모양이다
.
주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체리의 표정엔 활기가 넘쳤다.

 

난 희영의 얼굴을 살피지 않았다.
그래도 문득 그녀를 위해 자동차를 사야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체리가 이번 주말에 같이 양평을 가자고 제안했다.

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희영의 침묵때문이였을 것이다.

내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응낙했다.


남자는 가끔 호기를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