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
내겐 담기 힘든 이름이였다. 선천적 결함탓이다.
고교시절, 음악시간에 실기 테스트로 [이히 리베 디히] 를 불러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나름 멋드러지게 부르는데,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박장 대소했다. 그 땐 이유를 몰랐다.
어학연수를 가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He를 발음해도 사람들은 She 로 알아들었다.
[이시 리베 디시]
난 [히] 발음이 안됐다. 미국에선 He 를 발음할때 [이]로 발음하며 대충 소통은 할 수 있었다.
늘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부담스러웠다.
이름을 담을 수 없는 나의 비애를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 시영씨'
어렵게 불러보아도, 변함없이 우아한 미소로 바라보는 모습에 감동했드랬다.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가급적 회사에서는 서로 대화를 삼가했다.
덕분에 그녀와 교환하는 눈빛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역시 말보다 눈빛이야말로 마음을 전달하는데 탁월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특히 그녀는 말없이도 내 기분을 잘 파악하는 듯 했다.
가끔 메신저로 내 컨디션을 지적해주는 마음이 훈훈했다.
*
내게 변화가 생겼다.
머리에 젤이라는 것을 바르게 되었고, 와이셔츠에 구김이 보이면 어머니에게 불평을 했다.
매주 수요일 평상복을 입는 날이면 아침에 거울을 몇번씩이나 보게 됐고, 출근길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돌이켜 보면, 난 마음을 억제하고 닫는데 익숙했던 거 같다.
그러나 마음이 흐르는대로 따르는 기쁨을 새롭게 배웠다.
마음을 열고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닐것이다.
전에는 신경쓰지 않았는데, 식당에서 쫄면이나 덮밥류에 깨소금이 많이 뿌려져 있으면 못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싫어해서다.
미모하고 동떨어진 줄 알았던 배두나가 볼수록 이뻐보였다.
그녀가 이쁘다고 했다.
무슨 음반 메이커 인줄 알았던 'R&B' 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알 켈리의 노래는 더없이 깊게 느껴졌다.
그녀가 좋다고 했다.
처음의 낯설음만 극복한다면, 가치와 생각을 공유하고 상대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금방인 거 같다.
*
그녀의 친구, 체리
그녀는 친구를 그렇게 불렀다.
유치한 듯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세련되고 친근감이 넘치는 거 같다.
체리는 그녀 못지 않게 늘씬하고 미모가 출중했는데, 둘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같았다.
희영과 있다보면 당시 막 보급이 한창이던 휴대폰이 자주 울렸다.
대부분 체리였다. 체리는 그녀와 자주 통화를 했고, 간혹 우리의 술자리나 식사자리에도 합류했다.
체리도 나의 이야기을 즐거워 하는 듯 했고, 세명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다.
희영과 단둘이 있을 땐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들이 체리를 통해서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둘의 화제는 대부분이 패션에 대한 이야기였고, 간혹 영화나 음악이야기도 나눴다.
둘은 만나면, 일단 서로에 대한 찬미부터 시작했다.
'어머, 너 그렇게 블라우스에 받쳐입으니 너무 잘 어울린다.'
'호호 브릿지 다시 한거야? 고민하더니 기어이 했구나. 너~무 예쁘다.'
결코 익숙치 않은 그들의 화제가 신선하고 흥미있기도 했지만, 자꾸 듣자니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느낌도 들었다.
그들은 저축을 거의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월급날이나 보너스지급일은 그네들의 쇼핑스케즐이였다.
당시 난 박봉임에도 급여의 60%~70%이상을 저축했다.
자동차와 휴대폰이 없던 것이 전혀 부끄럽지도 않았고 계획도 없었다.
그녀가 이런 나를 어찌 생각할지 신경쓰이는 나자신을 깨닫고, 잠깐 초라함을 느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다짐했다.
나 자신은 그녀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생각하기 싫었다.
우린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고, 가치가 다르다.
각기 다른 가치를 존중해 주는 성숙함 따위를 고민했던 건 아닌거 같다.
단지 그녀와 같이 있으면 좋았고, 떨어져 있으면 생각났다.
체리의 남자친구를 소개받았다.
늘 그렇듯 이런 자리에서 남자들은 서로 조심한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정중했다.
호남형이고, 큰 키에 아주 마른 체형으로, 작은 눈이 왠지 소심해 보였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좀 특이했다.
체구에 비해 작은 자켓이 몸에 딱 달라붙는 느낌이였는데, 내겐 낯설게 보였다.
그에게는 신형 SUV 가 있었다.
체리 커플은 주말마다 교외로 드라이브를 하는 모양이다.
주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체리의 표정엔 활기가 넘쳤다.
난 희영의 얼굴을 살피지 않았다.
그래도 문득 그녀를 위해 자동차를 사야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체리가 이번 주말에 같이 양평을 가자고 제안했다.
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희영의 침묵때문이였을 것이다.
내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응낙했다.
남자는 가끔 호기를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