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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rtainment On/드라마&시트콤

해를품은달 김수현, 퓨전사극을 실감케한 귀여운 왕

 

해를품은달(이하 해품달)은 허구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그 운신의 폭이 자유롭습니다. 실존 인물을 다루는 사극의 경우, 특정 인물에 대한 묘사가 후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소송을 야기하기도 하고 역사적 고증에 어긋나면 역사왜곡이라는 철퇴를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품달 속 캐릭터들은 거침없이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정말 왕의 모습이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조차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가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극중 김수현의 귓볼에 확연히 드러나는 피어싱의 흔적조차 애교스런 '옥에티'가 될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원작과 달리 양명군과 잔실의 비중이 상당한데요, 양명군은 이미 월의 정체가 연우라는 것을 알아 버렸습니다. 신모의 무시무시한 엄포를 무릅쓰고 잔실이 그 사실을 알려줬기 때문인데요, 잔실은 양명이 생명의 은인이기에 돕고 싶어서 알려준 것이라 말했으나, 잔실이야말로 양명의 절절하고 애달픈 사랑을, 무녀 특유의 신기로 전이 받았기에 이러한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던 거지요. 신모에게 추궁받자, 잔실의 신기는 기어이 폭발하고 맙니다. 양명에게 빙의되어 한 많은 그의 숙명을 저주합니다. 잔실의 입을 통해 나온 말 '어머니는 왜 소자더러 남을 위해 살라고만 하십니까, 웃고 싶으면 웃고 뺏고 싶으면 빼앗으며 그리 살 것입니다'라는 말은 20세기의 실존주의와도 맥락이 닿아있는데요, 양명 스스로가 신모에게 말한 '그건 신(god)이 아닌 내가 결정할 일'라는 것도 조선시대라면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퓨전사극다운 흐름은 왕 이훤(김수현)을 통해 더욱 돋보입니다. 이날 이훤과 월은 우연히 '종로'에서 마주치는데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는 '종로'거리에서 두 사람은 현대적 정서와 과거의 배경이 어우러지는 퓨전 데이트를 즐깁니다. 이번 편의 부제답게 '밀애'였지요.


근엄하게 무게를 잡던 이훤은 거리에서 월을 마주하자, 관심녀를 소개팅으로 만난 21세기의 청년처럼 수줍어하고 어색해 합니다. 눈도 제대로 마추지 못하고 슬쩍 슬쩍 곁눈질을 하다 자문자답 시리즈를 펼치는데요,
'여긴 어찌 나온 것이냐.... 아.. 볼일이 있어서 나왔다고 했지.. 나는 잠행 중이었다... 아.. 아까 말했던가.. '  빤히 쳐다보는 월의 눈빛에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꼬투리를 하나 잡아냅니다. 부적이라는 애가 낮에 이리 돌아다녀도 돼냐며 '어쩐지~~'라는 말의 어투에 해학을 담아 '자고 일어나면 찌뿌둥하더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고 농담을 건네는데요, 월의 웃음을 자아내고자 시도한 농담이건만 월은 왕의 현대적 정서를 접수하지 못했습니다. '옥체가 편치 않으십니까'라며 심려 깊은 눈길로 바라보는 월 앞에서 왕은 '뻘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관심녀의 웃음 한자락에 목매는 연애초보남의 습성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겠지요.



이렇듯 현대에도 익숙한 설레이는 데이트 풍경은 인형극 관람으로까지 이어지는데요, 무일푼의 남자를 대신해 관람료를 지불하고 겸손하게 웃어주는 여자, 기가 꺾일까 '환궁하면 바로 갚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 이를 귀엽게 바라보며 홀로 미소짓는 여자.. 그 모습에 기어이 '너는 이런 저질 공연이 재밌냐'며 허세를 부리는 남자..   이들의 데이트는 퓨전사극의 윤허아래 유쾌하게 펼쳐졌습니다. 국정을 논하고 정치적 계산을 따지던 왕도 설레임과 뻘쭘함을 드러내며 귀여운 남자가 되어버렸지요. 퓨전사극과 김수현의 절묘한 만남이 이뤄낸 색다른 볼거리였지요. 왕이 왕답다, 어쩌면 이런 것도 우리가 깨야할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첨언합니다.
   본문 중 양명은, 월이 연우임을 알게 됐다 표현하였으나, 극중 양명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음이 확인됐습니다.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