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 on

새해인사에 얽힌 작지만 치명적인 실수



 
난 경리업무를 보고 있다.
업무성격상 타부서의 서류접수를 많이 하게 되는데, 주로 여직원들을 상대하게 된다. 이들이 업무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특정 데이타를 등록해줘야 할 경우가 있다. 난 내부고객에 대한 서비스마인드가 투철해서, 다른 일로 바쁠때라도, 등록요청이 오면 그걸 우선적으로 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상대하는 여직원들은, 서울 본사 뿐아니라 지방의 4개공장에도 있다. 공장에선 보통 등록요청서를 팩스로 보내온다. 근데 몇달 전 충남 공장에 새로 입사한 여직원이 있는데, '맹'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름은 김복순.

실제로 복순씨가 보내오는 등록요청서는 오타투성이고 중요한 핵심정보조차 틀리기 일쑤였다. 전화로 몇번 지적을 해줘도, 사람좋은 웃음만 지을뿐이었다.
 
복순씨는 나와 관련된 일뿐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특유의 '맹'활약을 하는 모양이다. 차츰 내 주변의 직원들이 그녀에게 전화상으로 짜증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됐다.

사람심리가 우스운게 남들이 무시하는 사람에 대해선 같이 묻어가는 경향이 있는가 보다.
어느순간 복순씨를 대하는 나의 태도 역시 상당히 냉냉해지고 딱딱해졌음을 실감했다. 그녀의 등록요청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난 그녀를 유독 대충 상대하게 됐다. 나의 이런 태도탓인지 그녀의 업무태도는 더욱 위축됐고, 그녀의 일처리 역시 더욱 더 엉망이 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그걸 느끼며 난, 내 안에 잔인한 본성이 있음을 알았다.

그 무렵 복순씨가 교육을 받기 위해 본사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녀가 나타났을때, 순간적으로 울 사무실에 텔런트 김사랑씨가 방문했는 줄 알았다. 완전 '김사랑'급이다.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키 170의 허리케인 몸매와 자체발광하는 마스크, 잔잔하고 해맑은 미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 환한 미소로 내게 다가와 상냥히 인사를 해왔을때 난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고 말았다;;;
맹한 업무처리와 자신감 없는 태도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교육이 끝나고 공장에서 올라온 여직원들과 회식자리를 가졌다. 복순씨를 처음 본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녀가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남자직원뿐 아니라 여직원들도 그녀와 마구마구 친한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수치를 아는 사람이다. 집단 심리에 함몰되어 잔인한 본성을 드러냈던 내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그녀에게 멀찌기 떨어져 있었다. 암튼 난 오랜만에 만난 다른 공장직원들과 술을 많이 먹었다.

노래방에 갔다.
난 벌써 반년 가까이 연예블로그를 운영해오고 있다. 최신가요에 익숙할 수 밖에 없다. 비스트의 신곡하나를 적당한 댄스까지 섞어 부르자, 좌중의 반응이 뜨거웠다.
'원래 이 노래는 기존 비스트의 스타일과는 조금 다른..... 비스트 멤버인 윤두준은 원래 JYP에서 조권이랑... ' 나도 내가 연예 상식이 이렇게 해박한지 몰랐다. 그냥 술술나와 버렸다.
 

노래방의 조명아래에서 김사랑급 미모를 더욱 빛내고 있던 복순씨가 감탄하는 눈으로 말했다. '워낙 무뚝뚝하시고, 점잖은 분인줄 알았는데, 깜짝 놀랬어요. 앞으로 과장님 팬글럽 회원할래요'

이 후 난 복순씨에게 급 친절해졌다. 한껏 격려하고 자상하게 설명해주다보니 복순씨도 점차 자신감을 갖고 여러방면으로 업무가 일취월장하게 됐다.
이렇게 되자 복순씨는 업무 메일에 간단한 안부인사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으로 시작하는 메일엔 간략한 업무이야기와 더불어 날씨 이야기 회사분위기 등 간단한 코멘트가 첨가된 것이다. 그녀의 표현대로 '무뚝뚝하고 점잖은 내가 그런 안부에 답하는 것도 쑥쓰러웠다. 그냥 난 업무적인 이야기만 답변했을 뿐이다.


그런데 며칠전 연말을 맞아 복순씨가 보내온 업무 메일엔 평소보다 한결 정중하고 따뜻한 안부인사가 있었고,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로 끝을 맺었다. 안부인사를 계속 무시하는 게 미안해서 간략한 업무답변 밑에 간단한 인사말을 보탰다. '복순씨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점잖게 이정도만 적었다. 아니 그렇게 적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복순씨가 갑자기 냉냉해졌다. 업무상 전화통화를 해도 상당히 썰렁했다. 영문을 알수 없었다. 근데 어제 옆자리의 여직원이 내 무례함을 성토했다.
그제야 난 내가 보냈던 메일을 다시 읽어봤다. 딱 한글자에서 의도치 않게 오타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적혀있었다. '복순씨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비지니스 레터에 오타가 없도록 주의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