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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세상

전국민이 올림픽만 봐야하나

 

 

 

88 올릭픽은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여준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TV에선 질서 있게 버스를 타자는 캠페인이 숱하게 반복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학교차원으로 동원되어 비인기종목의 경기장에서 목청껏 응원해야 했습니다. 또 거리의 간판에선 '보신탕'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췄지요. 개고기를 먹는 우리의 문화는 국가차원에서 제재되었습니다.


이러한 88올림픽의 열광적 분위기는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을 법한데요, 헌데 이러한 분위기를 20년 후 중국인에게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08년 북경올림픽 당시 경기장마다 국기를 흔들며 열렬히 응원하는 중국인들의 얼굴에도 자긍심과 열정이 가득했지요, 하지만 88올림픽 당시 우리의 열광적인 응원이나 북경올림픽 당시 중국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인의 응원 만큼 세계인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 둘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거기에 개인의 행복이 있느냐의 여부일 것입니다. 88 올림픽이나 북경올림픽에는 국가와 민족만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통제된 질서와 연출된 열정이 있었지요. 반면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의 거리엔 '개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켰고 '개인'의 즐거움을 폭발시켰습니다. 그래서 세계인이 감동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국가차원에서 가장 주목한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와 열광하자, 중국은 국가차원에서 자국민을 통제했습니다. 한국팀의 축구결과가 심판의 판파판정에 따른 거라며 공영방송을 통해 노골적으로 한국의 축제를 폄하했지요. 천안문 사태이후,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이는 것에 극도로 민감해진 중국의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집단이 우선시 되는 중국의 모습은 80년대의 한국을 떠올립니다. 물론 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민주화라는 결실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 학생들에겐 온통 이념과 국가 뿐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으로 유학을 간 한국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요. 개인의 행복을 따지고 즐기는 유럽학생들 앞에서, 오로지 숭고한 이념만을 이야기해야만 했던 한국학생은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지요. 국가보다 개인을 생각한다면 죄책감마저 느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진통을 겪으며 민주화를 이룩했고, 이제는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바로 한류를 꽃피울 수 있었던 근간이지요. 중국에서 아무리 돈을 들려 영화를 만들어도 세계인에게 어필하기 힘든 이유는, 통제를 받는 사회에서 만든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중시되고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시대가 됐을때 그 사회의 역량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요즘 올림픽중계로 인해 기존의 정규방송이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많은 예능, 드라마들의 편성이 연기되거나 취소되었습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지만 시대의 문화를 이끄는 것이 방송 경향이라는 점에서 고민해 볼만한 부분입니다. 특히 으레 올림픽을 위해 지상파 3사가 모두 비상체제에 접어드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영광의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땀방울을 흘린 올림픽의 영웅들이 펼치는 활약을 소홀하게 다뤄서는 안되겠지만, 전폭적으로 올림픽에 올인하는 방송분위기는 개인과 문화의 다양성 관점에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올림픽을 충분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올림픽외에도 다양한 즐길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상파에서 '이게 좋으니 당연히 모두 이것을 즐겨라'하고 강제하는 것은 20년전 올림픽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난 올림픽 대신 드라마를 보고 싶다'라는 혹자의 욕구와 바람이 경시되지 않아도 올림픽은 충분히 숭고합니다.

 

국가적인 것, 숭고한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것, 통속적인 것 그래서 우리의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것이 너무도 쉽게 간과되고 있지는 않나 한번 생각해 볼일입니다.